
322일 전
김해 산책하기 좋은 코스 봉황동 유적
제11기 김해시 SNS 서포터즈 윤은정
김해 산책하기 좋은 코스 봉황동 유적을 다녀왔습니다.
봉화동 유적이 포함된 가야사 누리길이라고 하는데요.
가야사 누리길 주요지점으로는
국립김해박물관,수로왕비릉,대성동유적,
수릉원,수로왕릉,김해한옥체험관,
봉황동연못, 봉황동유적(황세바위),김해향교,
김해시장,동상시장,가야인거리가 있습니다.
김해 봉황동 유적 배치도
왕궁 추정지,봉황토성부(동부),봉황토성(서부),
왕궁대형건물지,회현리조개무지,
조개무지단면전시관, 가야 배 출토지,
항구유적, 봉황대가 있습니다.
가야인의 생활과 문화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이외에는
가야인의 생활과 습속에 대한 있는 기록이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고고학적 조사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고구려 고분벽화 등 실물자료를 참고하여
파악할 수 밖에 없는데
패총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생활쓰레기더비로서
이를 통해 당시의 자연환경, 생활상을
밝힐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세워진 망루는 가야시대 당시의
건축기술과 구조를 고려하여 추청 복원한 것으로
높이 약 10m라고 해요.
망루는 주변을 효율적으로 관찰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입니다.
외부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러한 망루는 청동기 시대의 취락 유적에서도
많이 확인되고 있으며
가야시대에도 널리 이용되었다고 해요.
특히, 봉화유적은 금관가야의 도성유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선박의 진출입과 외적의 침입을 관찰 감시하기 위해
많은 망루를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야인들이 식생활은 벼농사가 주 생업이지만
그 밖의 곡물도 같이 재배하였으며,
단백질원을 확보하기 위한
굴,백합 등의 조개 채취나 고기잡이,
사슴,멧돼지 등의 사냥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시루 등 각종 취사용 그릇,
조리용 도구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다양한 조리법을 구사할 줄 알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야인들의 의생활은
직접 남아 있는 예는 없지만
철기에 녹과 함께 부착된 섬유 흔적을 통해
비단 같은 직물로 의복을 지어 입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형태는 고분 벽화에 묘사된 바를
참조해 볼때 긴 저고리와 바지,
폭이 넓은 치마를 착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가야인들의 고상가옥 주거
이곳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해요.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 46호 주거지를 참고하여
추정복원한 것입니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과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입니다.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축물이 많습니다.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 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침수 등으로부터
방해,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자연을 벗삼아 김해 산책하기 좋은 코스입니다.
김해 봉황동 유적 이야기 황세바위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숙왕)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입니다.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 시키기로
약속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황세바위입니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 수 없이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 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황세 또한 여의 낭자를 그리워하며
병을 얻어 그해에 여의 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김해 봉황동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 확대 지정된 곳입니다.
이곳은 고인돌,조개무지,항구시설,
봉황 토성 등이 발굴되어
청동기 시대부터 가야 시대까지의
복합 유적의 성격으르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가야인의 생활상과 더불어
가야 왕권의 존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봉황동유적 패총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패총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조개무덤,조개무지라는 뜻이지만
선사 이후 인류가 살아가면서
형성되는 생활 쓰레기가 퇴적된 유적입니다.
대체로 몇 세기간의 유구한 시간에 걸쳐
퇴적됨에 따라 시기별로 층위가 형성되는데
그 출토 유물을 통해
당시 생활문화의 변천상을 알 수 있어요.
QR코드를 찍으면 봉황동 유적 패총이야기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회현리 패총은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만들어진
조개무지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각종 철기 및
골각기,토기와 탄화미 등은
가야 시대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중국 화폐 환전은
당시의 국제 교역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해 산책하지 좋은 봉황동 유적에 대해 알아보는
값진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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