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마산 오동동 문화거리 골목 역사 문화 탐방
마산은 구한말 개항장으로 지정된 후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과 일본을 오고 가는 사람들과 물자들로 북적이는 항구로 급부상하였고 경상도에서는 부산과 대구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중 마산 오동동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의 거주지로 구마산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현재까지 많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산 오동동과 오동동 주위에서의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조창 터입니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거리길 58)
조창은 세곡으로 거둔 현물을 보관 운송하는 일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조선 시대 마산포에 설치되었으며 조창으로 좌조창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403년(태종 3) 일어난 조운선 조난사고(경상도 조선 34척 침몰, 선원 1천 명 익사, 쌀 1만 석 수몰)를 계기로 하여 조운이 폐지되면서 충주의 가흥창에 수납하였으며, 여기에서부터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경창에 상납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 관찰사 조엄의 진언에 따라 1760년(영조 36) 좌조창으로서 가산청이 설치되었습니다.
마산창에는 1천 석의 쌀을 실을 수 있는 조선 20척이 배치되어 창원, 함안, 칠원, 진해, 거제, 웅천 및 의령의 동북 면과 고성의 동남면 등 8읍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5월 15일 안으로 경장에 상납하였습니다.
조창이 들어서면서 마산포는 번화한 고을로 변모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조창 인근이 번성하면서 공관과 민가 건물이 줄을 이어 들어서고, 동성, 중성, 오산, 서성, 성산, 성호의 6개 리가 생겨났고 이것이 오늘날 마산이라고 하는 도시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창동이란 지명은 마산창이 있던 곳이라 하여 창자를 따서 동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조창의 일대 건물 중 유정당이라는 큰 건물이 있었습니다. 마산창의 관아로서 본당으로 쓰였습니다.
마산창이 설치된 1760년 당시 진주 목사 조덕상이 쓴 유정당기문에 따르면, 1758년(영조 34) 경상도 관찰사가 조엄이 세곡의 보관과 관리 및 운송 등에 따른 그간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조창을 설치하여, 공사에 착수한 지 5개월 만에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미산창은 대청(유정당) 7칸, 동별당 6칸, 서별당 5칸, 동고 15칸 서고 13칸, 좌익랑 2칸, 우익랑 2칸, 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규모였다고 합니다.
1895년에 조운 제도가 폐지되고 1899년에 마산항이 개항하면서 조창 유정당은 개항 업무를 보는 접무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원 감리서가 개항 사무를 맡아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창 부지를 가로질러 도로가 나고 마산창의 건물들을 헐렸습니다. 1918년 조창 자리에 일제 식민지의 상징과도 같은 조선식산은행이 들어섰으며, 현재는 유정당에 대한 문헌만이 남아있습니다.
다음은 남저 이우식 선생 집터입니다. (중성동 136번지)
호는 남저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 쇼쿠 영어학교와 도요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여순, 최정학 등 동지들과 모의하고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1920년 귀국하여 안희제, 김효석 등과 함께 백산무역 주식회사를 설립,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습니다.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사, 1927년 중외일보사를 설립,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습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 연구회의 조선어 사전 편찬회에 가입하여 재정을 지원하였고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비를 지원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이인 김양수 장현식 등과 조선어 사전 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역의 재정 지원을 하였습니다. 1942년 1월 이극로, 이윤재, 등과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조선 양사원을 조직하려다 실패하였고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흥원 경찰서와 함흥 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선고를 받아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2개월의 옥고를 겪었습니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의 재정이사로 선임되었고 1963년에 한글 공로상을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다음은 남전 옥기환 집터입니다.(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로 140)
남전 옥기환은 회사를 설립하여 경제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독립자금도 지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장래가 인재 양성에 있음을 깨닫고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을 개설하였습니다. 평생 동안 향토발전을 위해 이바지하였으며, 초대 마산시장으로 평생 한복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다음은 김명시 장군 생가터입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185-1)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명시는 중국에서 대일항전에 참전해 총을 들고 싸운 독립운동가이며 혁명가입니다. 어머니 김인석. 오빠 김형선, 동생 김형윤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마산공립보동학교(성호초)를 졸업하고 1925에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습니다. 25세 때 종국에서 국내로 잠입하여 노동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활동하다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극렬한 이념같등으로 인하여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김명시 장군의 흔적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바로 김명시 장군 학교 길입니다. (오동서1길)
이 오래된 골목은 김명시의 집(현 오동동 문화광장 자리)에서학교(현 성호초)로 향하는 길입니다. 일제강점기 여성이 공부할 기회를 얻기 힘든 시절에 어시장의 가난한 생선 행상의 딸이었던 소녀 김명시는 어떤 꿈과 희망을 안고 학교로 갔을까요?
마산의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을 알리고 기억하고자 소녀 김명시의 발길이 닿았을 이 길에 그의 삶을 기록합니다.
작가 레오다브(Leodav, 최성욱)는 저항문화에서 시작한 거리예술 그래피티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을 현대의 여성상으로 재현했습니다.
전시된 작품은 무장독립 전쟁의 전선에서 있는 항일 전사 김명시 창원시 여성친화 안심 귀가 캠페인을 함께하며 골목을 지키는 경찰관 김명시, 꿈과 희망을 안고 학교로 가는 16세 소녀 김명시와 1925년, 모스크바 유학길에 김명시가 지녔던 여권에 대한민국의 이름을 적어 선물한 그래피티입니다.
다음은 마산형무소 터입니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155-1)
우리나라에 근대 시설의 감옥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1907년 한·일 협약으로 일본이 사법과 감옥에 대한 업무를 행사하면서부터입니다.
처음에는 분감 8개소를 설치하였으나 감옥이 부족하여 분감 13개소를 설치하였습니다.
마산형무소는 부산본감의 분감으로 처음에는 부림 시장 입구의 입구에 설치되었다가 1913년 지금의 지리로 이전하였으며 1961년도에 교도소 이름을 바꾼 후 1970년도 회성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마산형무소에는 일제시대 민족 해방운동에 앞장섰던 수많은 항일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주차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문학평론가 정재관 집터입니다.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서6길 40 )
문학평론가 정재관(1934.6.12.~1985.12.30.) 선생은 마산시 중성동 112번지에서 태어나 성호초, 마산중 .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마산고등학교 교사, 마산교육대학교수, 창원대학교 교수, 경남 매일 수석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가작 입선하여 문인으로 등단하였습니다.
강단에서는 많은 제자를 길렀고, 언론인으로서는 정론직필의 논객이었으며, 학자로서는 이곳 응적재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해박한 학문과 깊은 사색으로 문학, 언어, 사상에 관한 불후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1980년 권위주의 정부에 의해 교수직과 수석논설 위원직에서 해직, 1984년 복직됐으나 1985년 52세로 작고하였습니다.
선생을 기리는 제자들이 힘을 모아 1986년에 추모비를 세우고, 2009년에 심포지엄을 열었으며 작고하신 지 33년이 지난 2018년에는 평론집과 칼럼 집을 펴냈습니다. 현재는 정재관 선생의 집은 카페 겸 음식점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산 오동동 주위에서 수많은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마산 오동동 주위에는 번화가라 먹거리와 놀거리가 많으며 창동 예술촌이라는 문화, 예술 거리가 있으니 같이 즐기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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