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전
논산, 아름다운 홍예교 중 하나 미내천 미내다리[조암교]
뜨거운 태양이 하루하루
기온을 높여가는 요즘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신가요?
휴가 준비에 들떠 있다고요?
ㅎㅎㅎ
좋습니다.
휴가를 바다로 또는 산으로
가는 분들이 대부분인데요.
물과 산 역사가 어우러진 이곳
논산으로 오세요.
논산은 조선시대 유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있는데요.
그중 기호학파의 중심인 이곳 논산에는
우리의 정신과 지혜를 살찌울
역사 문화 공간이 참 많은데요.
오늘은 대한민국 홍예교 중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미내다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미내다리는 1973.12.24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데요.
대부분이 새롭게 복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위 사진에서 보면 담박 표시가 나죠?
미내다리라는 이름은
예전에 강경천을 미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며,
'여지승람'에는 미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조암교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은진미교비(恩津渼橋碑)에 따르면
조선시대인 1731년(영조 7)에
강경촌(江景村)에 살던
석설산(石雪山) 송만운(宋萬雲)이 주동이 되어
황산 사람 유부업 등 3명과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이 재물을 모아
1년 만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현재의 다리를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는
미내다리는 강경·황산·여산의 유지들
재물을 모아
평교(平橋)였던 것을 3개의 홍예가
있는 돌다리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지 못한답니다.
^^
은진미교비는 자연석으로 된 비석으로
과거 미내교 옆에 있었으나 파손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져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며칠 전의 미내다리 모습인데요.
다리 뒤편 둔덕에 하얀 점같이
이어진 것이 보이죠?
2012년 3월 촬영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
자유인 계룡도령 춘월이 찍은
2012년 사진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수풀로만 보이는데요.
미내다리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다니는 통로를 만든 듯한데요.
주변의 잡초 때문이겠지만
돌의 높이가 상당하답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아주 조심스럽게 다녀야 할 징검다리[?]입니다.
저도 몇 번 걸려서 넘어질 뻔했답니다.
ㅎㅎㅎ
홍예교인 미내다리에는 재미난 전설이
하나 전하고 있는데요.
어느 날,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너려면 배로만
이동해야 했다는데
기후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환경이 바뀌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겠죠?
그래서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에서 다리를 놓기로 하였답니다.
이때 두 청년이 다리 공사를 맡기로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돈을 거두었는데
다리를 완성하고 보니 돈이 남아
남은 돈을 어떻게 할까 의논하였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인
돈을 낸 마을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지만
나누어 주기에는 너무나 적은 돈이어서
고민 끝에 나중에 다리가 부서지면
남은 돈으로 보수를 위해 사용하기로 하고
아무도 모르게 다리 근처에
돈을 묻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났지만 다리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튼튼하게 놓은
두 청년을 칭찬하는 말로
마을이 들썩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를 놓았던
두 청년 중 한 명이
갑자기 깊은 병에 걸려 좋다는
약을 써도 낳지 않았다는데요.
친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온 친구는
병이 깊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다리 밑에
묻어 둔 돈을 써야겠다 생각하고
돈을 묻어 둔 장소를 파헤쳤지만
돈은 그곳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청년은 ‘친구가 이미
돈을 꺼내 갔나 보구나.
그 돈을 써서라도 병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청년의 짐작대로
그 돈은 이미 병이 든 청년이 몰래
가져다 써 버린 뒤였다고 합니다.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고 몰래 돈을
훔친 벌을 받는 것인지
병이 든 청년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어느 날 저녁 큰 구렁이로 변해
식구들은 두고 집을 나가
미내다리 아래로 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구렁이는 이따금 다리 근처에 나와
눈물을 지으며 후회를 하였으나
다리 밑에 묻어 둔 돈을
꺼내 간 것이 알려지면서
누구 하나 구렁이를 동정하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구렁이를 욕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구렁이는 하늘로 오르려다가
땅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뭐 사실이니 아니니 보다는
그저 신의를 소중히 하라는
전설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ㅎㅎㅎ
미내다리사적비
산은 신선이있으므로 해서 유명해지고 물은 용이있으므로해서 유명해진다는 옛말이있다. 그러나 특수한 고사가 있을때 그 산과 물은 더욱 유명해지는것이다. 비단산과 물뿐아니라 어느들과마을까지도 그곳에 가사있으면 그이름을 따르게마련이다. 예컨대 노나라의 곡부와 신라의 계림은 공자나 김알지의 연고지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후세의 유적지로 이름을 얻을수있었겠는가. 비단산과 들에만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물건에도 이름을 얻는수가 있으니 이름있는 큰다리에는 그유래된 고사가 또한 우연치 않은 것이다. 다리의 역사는 매우 오래다. 하나라 이전이라고해서 다리가 어찌없으리마는 문헌에의하면 은나라에서 처음으로 다리라는 명칭이 보이고 수나라 문왕이 배를 만들어서 다리로 사용하였다고하니 이것이 곧 후세의 배다리인셈이다. 이리하여 나무다리와 돌다리가 생겨서 사람들이물건드는 괴로움을 덜었던것이다. 이곳 논산시채운면 삼거리의 금강지류 인강경 냇가에 미내다리라는 옛다리의 잔해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곁에는 이다리의 사적을 기록한 옛빗돌이 세도막이난 채로 버려져있다. 이것을 보고 그누가 애석하게 여기지 않으리오마는 이제 그 잔영과 전설을 가지고 이다리의 유래를 길이 전하기 위하여 본도문화재계의 고증으로 금강이 호서호남을분리시키는데 이삼거리는 바로 그양호를 연결하는 요로로 되어왔던것이다. 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곳에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하여 조암교 혹은미교라고 일러웠던것이다. 그후 영조 사년에돌로 만든 구름다리가 루어졌는데 지금 남아있는것이 바로 그모습이다. 옛비문에 따르면 강경의 석설산과 송만운이 처음 발의하고 주동이 되어 모금한지 일년도 되지않아 서관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다리를 완성하였다고한다. 여기에는 특하승려인경원설우청원과황산의유부엄과여산의강영달강육평등이 협조해서 이루었다고하였다. 불가의말에 다리를 놓는것은 여덟가지 복전의 첫째가 된다는말이있어서 이와 같이 빨리 준공 할수있었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옛날에는 백성이 괴로워도 나라에서 그것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독지가를 기다려서야 다리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이강을 건느는다리가 철교 고속도로 및 기타도로가 몇개씩이나 있으니 괴로움이 없어졌다뿐만아니라 선인들이 힘을 모아 남겨 놓은 옛다리는 이제 비록 폐물이 도히어잔해로 남아있지 조상의 얼이 담긴 유적을 그대로 버릴수가 없어서 옛비는 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는 한편 이제 그 모든 사실을 이와같이 간략히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로 삼고저 하는바이다
서기일천구백팔십삼년일월일
충남대학교교수 학산 조종업 지음 /
장암 이곤순 씀
논산군수 조기택 세움
아마도 미내다리사적비 원문을
그대로 올린 사람은 처음이 아닐까요?
ㅎㅎㅎ
누군가는 해두면 좋을 듯해서 삽질함!!!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박정희에 의한 5·16 쿠데타가 발생한 이듬해
군인들이 실권을 잡은 상황에서
논산 훈련소 연대장이
다리의 장대석들을 훈련소 정문으로 쓰려고
실어 갔다가 불의의 변을 당해 그 연대장이
죽어 버리게 되자 미내다리의 돌은 건드리면
큰 횡액이 닥친다는 소문이 나면서
겁먹은 군에서는 장대석들을
원래의 자리로 다시 갖다 놓았다고
전하는데 미내다리와 상관된 또 다른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원래의 미내다리 홍예 중앙의 긴 장대석에는
용머리[?]인지 호랑이 머리[?]인지가
조각되어 있는데...
단순한 다리로서 만의 기능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당히 공을 많이 들여
선조들의 멋이 고스란히 담긴
다리인 것 같습니다.
미내다리를 자기 나이대로 왔다 갔다 하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선 정월 대보름날이면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답교놀이도 열려
많은 추억들을 남기기도 했답니다.
미내다리는 둑과 나란히 놓여 있으며
지금 보이는 경천을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지만
강경천 옆구리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를 위해
세워진 다리로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3칸의 무지개 모양을 만들고,
그 사이마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린
홍예교입니다.
논산이나 강경에서 전해지는 또 다른
미내다리에 대한 이야기 중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이 지역 출신들에게는
논산의 개태사 철확과, 관촉사의 은진미륵,
그리고 강경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물어본다고 합니다.
ㅎㅎㅎ
누가 죽었다 되돌아와서 전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지역의 논산 강경, 채운 지역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던
명물이라는 이야기겠지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다리인 미내다리는
지금은 원래의 위치가 아닌 곳에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서 있지만
그 옛날 강경이 번성할 즈음 배로 다니던
전라도와 충청도를 길로 이어주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던 다리였다고 합니다.
이곳 미내다리를 기준으로 보자면
바로 다리를 건너면 젓갈의 고장 강경인데요.
출출한 속을 달래거나 별미를 찾는다면
강경 맛집을 검색하여 입에 맞거나
궁금한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그리고 옥녀봉을 올라 전설과 함께 굽이 저
흐르는 금강을 즐기는 것도 좋습니다.
옥녀봉에서 내려오면 젓갈 시장과
강경의 역사가 담긴 근대역사 문화거리를
걷는 것도 논산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 중 하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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