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전
[경남/사천] 아름다운 자연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수군 기지 대방진 굴항에서 사천의 꿈을 바라봅니다.
2025년 경상남도 뉴미디어 프렌즈 조윤희
지방을 여행하면서 사진으로 추억을 담아 저장하다 보면 유독 떠오르는 곳 중에서 몇 해 전 겨울 어느 날에 다녀왔던 사천 대방진 굴항이 추억 속에서 춤을 추고 있던 차에 사천으로 1박2일 여행 삼아 다녀오면서 재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대방진 굴항은 사천시 대방동 바깥쪽 바닷가에 있는 2,099m²(635평)의 인공 항구로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봄빛 야무지게 물들고 있는 이곳, 저와 함께 이순신 장군의 흔적과 오늘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대방진 굴항을 둘러 보실까요?
주차장과 도로가 연접해 있는 대방진 굴항의 모습은 한 마디로 화가들의 성지라고 불러야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봄이 만든 시간 속에서 공간을 대여해 준 것 같이 고운 빛으로 나무마다 새로운 생명들이 자리해 있어서 겨울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풋풋한 첫사랑의 감동으로 다가오더군요.
조선 순조(純祖) 때 창선도(昌善島)와 적량첨사(赤梁僉使)와의 군사 연락을 위해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에 축조한 항만인 대방진 굴항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봐도 멋진 풍경으로 감성을 일깨워 준답니다.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대방진 굴항을 둘러보시다 보면 유난히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4,621㎡의 면적에 수령 200년 이상인 팽나무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해요.
대방진 굴항은 고려 시대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군항 시설의 하나인 구라량의 진영이 있던 곳이었답니다.
그 뒤 구라량이 폐쇄되어 쇠퇴했던 것을 조선 순조(재위 1801∼1834) 때 진주 병마절도사가 진주목 관하의 창선도와 적량첨사와의 군사적 연락을 위해, 둑을 쌓아 굴항을 만든 것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을 수군기지로 이용했답니다.
이순신 장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잘 아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1545년 4월 28일(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에 태어나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에 향년 53세의 시간을 살았던 16세기 말 조선의 명장이자 구국 영웅이며,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제독이었지요.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그의 일생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다음 세대에게 수많은 국민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존재만으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구국 영웅으로,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로써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대형 동상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며,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선두 지휘하여 적의 함대를 전멸시켰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 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했다지요.
명량에서 단 12척의 함대로 일본군을 대파하여 나라를 구했으며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 해전에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과 함께 조선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펼쳤고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 전술을 펼쳐 적선 200척을 격파하고 100척을 포획하였으며 일본군 수만 명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지만 날이 밝아 올 무렵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지요.
이순신의 이름을 딴 대교, 학교, 함선과 거리 등이 조성되어 있어서 한국인에게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역사적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한 그가 사천의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듯한 모습으로 세워진 동상과 굴항의 모습이 분명히 차이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 같아 긴 의자에서 바다를 향해 앉았다가 일어났네요.
오래된 나무들 그리고 나무옹이...
굴항의 오랜 나무에는 옹이들이 얼마나 툭툭 불거졌던지 사람으로 치면 고통의 무게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텐데 ... 균류의 공격을 막아 나무줄기로의 침입을 방어하는 보루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나무옹이들이 나무마다 대수롭지 않게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역사의 뒤틀림을 묵언으로 고스란히 받아낸 것 같아 고맙다 하면서 쓰다듬어 주었네요.
우물
돌로 쌓은 석축을 뚫고? 아니면 있던 나무를 그대로 살린 채 쌓은 석축에 유난히 눈이 가는 곳이 있어서 가까이 갔더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우물처럼 보이는 공간도 보였는데 지금은 물이 말랐는지 형태만 갖춰져 있더군요. 물이 귀한 바닷가에서 이곳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을 텐데 허술한 관리에 조금 안타깝더군요.
석축을 따라 한 바퀴, 또 한 바퀴...
울창한 나무숲에 막 돋아나 자라기 시작하는 잎들 사이로 벽화도 보이고 정자도 보여 그곳으로 걸음을 옮겨 보았습니다.
수령이 200년이 넘는 느티나무, 푸조나무, 서어나무, 팽나무 등이 굴항의 모습을 깜쪽같이 감춰주는 효과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항을 벗어나 벽화가 그려진 마을 쪽으로 걸어가다가 돌아보니 이순신 장군이 수군기지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공원처럼 보여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요.
대방 마을 아트 벽화거리
조금 전만 해도 굴항과 어우러진 나무의 모습에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던 것과는 다른 감동이 이곳 대방마을에 '아트 벽화라는 공간으로 저를 이끌더라고요.
예전에 왔을 때의 좁고 지저분한 모습의 골목이 아니라 누구라도 들여다보게끔 하는 화려하고 깨끗한 벽화 골목으로 거듭나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곳이 사천의 또 다른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고 하니 마을 둘러보기로 한 것을 잘했다 싶더라고요.
‘큰 고을 대방 굴항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생활 인프라 개선 골목길 아트 벽화 사업을 완료한 상황을 잠시 검색해 보니, 시에서 사업비 2억 6000만 원을 들여 지난 9월 26일부터 사업에 착수해 최근 마무리했는데, 주민의 요구와 지역 특성에 맞춰 굴항길과 바닷길, 어업길, 꽃길 등 4가지 테마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하더라고요.
1. 굴항길
우선 대방진 굴항의 역사와 문화를 표현한 벽화로 전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굴항길’이 있고요.
2. 어업길
죽방렴과 어업 활동 등의 표현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생업 활동을 존중하는 의미를 담은 ‘어업길’이 있답니다.
3. 바닷길
그리고, 바다와 연결된 ‘바닷길’은 푸른 바다와 사천시를 대표하는 상괭이를 표현해 바다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고요.
4. 꽃길
청룡사 겹벚꽃, 와룡산 철쭉 등의 벽화로 지역의 꽃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꽃길'이 있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한 벽화 골목은 주민들의 삶과 생활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이곳 대방진 굴항의 역사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벽화라는 예술을 통해 접근하고 있어서 타 지역의 벽화보다 감동이 배로 다가오더군요.
벽화 골목을 둘러보고 함께 여행에 오르신 선생님이 계신 굴항 쪽으로 걸음하다가 불에 속이 다 타버린 나무 쪽으로 오니 외롭지 않게 예쁜 지지대를 문 삼아 만들어 놨더라고요. 사천시의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가 현실적으로 와닿아 누구라도 어서 굴항이 잇는 사천 대방진 굴항을 다녀오시라 권해 드리고 싶었답니다.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으려고 만든 군항(군항軍港. 군사적 목적으로 특별한 시설을 갖춘 항구. 흔히 군함이나 함대의 근거지가 됨) 시설 중의 하나로서 순조(1800~1834 재위) 때 군대 간에 연락을 하고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설치한 것이 대방선진(大芳船鎭)인 대방진 굴항의 축대 위로 봄이 나른하게 내려앉았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무렵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거북선을 숨기고 전쟁에 활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곳인 대방진 굴항은 성종 19년(1488)에 새로운 삼천진(三千鎭)이 설치되어 삼천포의 근해를 방비하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지금의 용현면 선진으로 옮겼다가 다시 통영의 미륵산 아래로 옮겨 갔기 때문에 삼천포 근해가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었었던 것을 순조(재위 1801∼1834년) 때에 선진에는 병선의 정박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뚝을 쌓아 활처럼 굽은 만(彎)을 만들었다고 해요.
굴항(掘項)을 설치할 당시의 선진에는 전함 2척과 300명의 수군 병력이 상주하고 있었고, 굴항의 축조공사에는 진주 병마절도사가 진주 관아 73개 면의 백성을 동원하여 돌로 둑을 쌓아 만들었던 것이 1820년경에 완공하였으며, 굴항 북편에는 수군장이 거처하는 동헌과 많은 관사들이 있어 수군촌(水軍村)을 이루었다고 하며, 또 잡곡을 포함한 환향미(還鄕米) 2만여 섬을 저장한 선진창(船鎭倉)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곳의 안내석이 역사의 증인처럼 굴항 석축 아래 묵묵히 서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등장하는 사천 대방진굴항에서 바다와 연결되는 목을 보지 않았다면 호수로 착각할 정도로 고요하고 아늑한 모습에 반하여 지금의 평화로움에 감사하지만 임진왜란 당시는 이곳은 바닷물 대신 민물을 채워 넣었다고 해요. 왜냐면 숨겨둔 배와 거북선에 굴이 달라붙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는데 교통이나 운송수단이 열악했을 당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이 기적 같은 일을 해냈을까 싶어 다시 봐도 울컥해집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내려놓고 내 목숨 남을 위해 바쳐서라도 충성한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이 오늘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있기를 바라면서 아름다운 사천의 바다와 함께 숨을 쉬고 있는 역사의 시간이 올바르게 다음 세대에게 왜곡 없이 이어지길 바라면서, 경남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꼭 사천 대방진 굴항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사천 대방진 굴항(泗川 大芳鎭 掘港)
✅주소 : 경상남도 사천시 굴항길 82-10 일대
(지번. 대방동 251-5번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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