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으로 떠나는

방구석 역사 여행

지금으로부터 반백년 전, 어지러운 사회를 고발했던 작품이 500여 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는데요, 바로 설공찬전입니다.

사회의 혼란스러움을 종교나 이념에 빗대었던 조선판 엑소시스트, 귀신 소설인데요, 길동전보다 100년이나 앞선 한글소설로 조선을 흔들었던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그 저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쓰이게 된 작품인지, 그 테마를 찾아 저와 함께 떠나볼까요?

이 설공찬전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성종 대의 명현지사였던 채수입니다. 채수는 연산군 때, 임사홍 탄핵상소로 좌천을 당하는가 하면, 폐비윤씨 예우 주장으로 파직을 당하죠. 아무튼 반정 계획에 명분이 필요했던 박원종 등은 채수를 포착합니다. 이에 기회주의자 채수의 사위 김감은 장인에게 독한 술로 취하게 한 후 거사 현장에 합류합니다. 채수는 얼떨결에 공신이 되지요.

거사가 끝나고서야 깨어나 사태를 알아차린 채수, 어쨌든 연산군의 악정(惡政) 종식을 기대했고,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중종을 안타까워합니다. 결국, 관직을 버리고 경북 상주에 정자 쾌재정을 짓고 은둔하지요. 유불선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그곳에서 설공찬전을 짓습니다.

이러한 설공찬전이 금서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설공찬전은, 억불숭유 정책을 비틀어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단시했던 불교윤회설로 당나라를 배신한 후량의 황제, 주전충까지 언급하며, 주전충을 중종에 빗댄 말로 조선왕조의 정통성까지 부정해버립니다.

이러한 파격적 서술은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요. 중종의 심경을 건드린 이 작품은 금서가 되어 모두 불태워지게 됩니다. 엄청난 사회적 반향은 불러왔지요. 즉, 남명 조식의 패드립-‘명종을 고아로, 문정왕후를 뒷방 과부’로 비판했던 단성소에 빗대기도 합니다.

500년의 긴 꿈에서 깨어난

설공찬전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이 작품은 1971년 국문학계에 최초로 소개됩니다. 반백년 동안 잠자던 설공찬전이 한 학자의 눈에 띄게 됩니다.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 탈초(초서를 정자로 바꿈) 작업 중 겹으로 접힌 종이 안쪽에서 중종 당시 금서였던 필사본을 발견합니다.

이 설공찬전은 왜 순창을

배경으로 쓰이게 되었을까요?

4천 여자 분량의 소설 내용을 확인한 학자는 다시 한번 놀랍니다. 순창 설씨의 실상이 소설의 토대였다는 사실이었지요. 순창 설씨는 박혁거세 탄생설화 6촌장의 하나인 설거백을 시조로 하는 성씨입니다. 경주 설씨 36세손 설자승이 순창의 입향조가 되면서 분파된 성씨입니다.

이후 설씨는 순창의 토착세력이 되는데요, 고려 말에는 성황대신으로 충렬왕 묘에 배향된 설공검, 조선시대에는 대사성에 오른 설위 등 요직에 등용됩니다. 설위는 설공찬의 증조부인데요, 족보에 보면 설위-설갑인-설충란이며, 설충란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 설공찬의 아버지입니다.

순창의 배경의 설공찬전 실상을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공찬의 아버지, 설충란은 아들 셋, 딸 셋을 두었다. 600여 년 전, 순창 금과면 동전에 입향한 공찬은 출가한 누이 가족들과도 동전에서 화목했다. 공찬의 형제 공순은 一蠹 정여창의 사위였고,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였다. 1498년, 김종직은 무오사화로, 정여창은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한다. 이때 정여창의 제자요, 사위인 설공순으로 인해 설위의 가문은 역적의 사돈 가문으로 연좌제로 몰린다. 공찬의 어머니는 효령대군(태종의 2남) 집안 출신이었다. 가문의 유망주였던 설공찬도, 어머니도 이때 병사하고, 공찬의 형제 설공포, 그리고 설공근(설충란 막내 아우인 설충회의 2남)은 순창 금과 내동 아미산에 숨어든다. 2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이러한 설위 계보의 실상을 차용해 당시 어지러운 사회를 빗대어 작품을 필했던 채수, 그는 설공찬의 어머니 이씨부인 친정 일가였다.

죽은 사람의 혼령이 산 사람에게 빙의되어 사회를 비판했던 작품, 주인공들의 묘소까지 실재하는 실상 소설입니다. 역적으로 몰려 몰락한 가족사가 순창고을의 희미한 사건의 하나로 잊힐 뻔했던 필화 소설, 그 핵심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설충란의 딸이자, 공찬의 누이는 혼인 후 얼마 안 되어 죽고, 공찬 또한 일찍 요절한다. 공찬의 죽은 혼령은 사촌동생 공침에게 빙의되어 저승에서의 일들을 친구들에게 들려준다. 작가는 因果應報, 事必歸正을 말하고 싶었을까?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벼슬을 했어도 저승에선 말짱 도루묵이라는 비판을 조목조목 나열한다.

첫째, 반역으로 임금이 된 자는 지옥에 가더라.

둘째, 여자도 글공부를 하면 저승에서는 출세하더라.

셋째, 바른말 하다가 죽은 사람은 저승에 가서는 좋은 벼슬을 하더라

넷째, 양반이라도 못된 짓을 한 사람은 지옥에 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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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전 테마관과 그 실상 둘러보기

이곳이 바로 소설의 배경지에 세워진 테마관입니다. 소설 속 집터는 매우리 174-1번지로 중앙식당 옆 골목 매우마을회관 뒤쪽에 있습니다. 마을 유래를 보면 마을 이름도 마암이라 했다고 하네요.

마을에서 큰 인물이 나면 회전했다는 소설 속의 바위 마암도 볼 수 있습니다. 설공찬의 증조부 설위가 태어났을 때도 이 바위가 돌았다고 하죠. 테마관 안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아담한 시설의 이 테마관은 설공찬전을 발견한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그의 연구 자료 150여 점을 기증하면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설공찬의 족보와 실질적 증거자료를 진열한 방, 그리고 설공찬의 이야기와 설공찬전의 원본이 진열되어 있는 방이 있습니다.

차분히 살펴볼까요? 입구 벽면에 지도가 하나 있는데요,

설갑인(설공찬의 조부)과 설위(설공찬의 증조부)의 묘, 금과면 동전리에 설공찬의 누나와 설충란(설공찬의 아버지)의 묘, 이씨 부인(설공찬의 어머니)과 설충수(공침의 아버지) 등, 설공찬의 족보에서 보던 조상들의 묘의 실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드러난 설공찬전의 국문학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1378년)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입니다. 최초라는 말은 언제나 번뜩이는 수식어죠. 설공찬전이란 소설에 대해 ‘최초’라는 수식어, 번뜩이는 타이틀 한번 읊어 볼까요?

1. 홍길동전보다 100년 앞선 최초의 한글 소설,

2.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할 정도의 조선최초로 대중화를 이루었던 소설,

3. 최초의 금서로 모조리 불태워진 소설이다.

70년대 학계에서 발표된 이 설공찬전은 금오신화와 기재기이(1553년) 사이 100여 년의 공백을 메워주는 소설로 그 가치를 운운합니다.

최초의 장편 소설이라는 국문소설 홍길동전이 완벽한 구조하고 보면 어떤 형태로든 100년의 공백을 메워줄 만한 다른 작품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 설공찬전을 발견함으로써 그 궁금증이 풀리게 됩니다.

중종시대, 공신들의 이권다툼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폭군 아래서 힘겨운 삶을 살았던 백성들은 태평한 세상을 소망했겠지요. 중종반정을 응원했을까요? 웬걸. 폭군 임금을 쫓아내고 태평성대를 이룩하자더니, 오히려 이권에 휘말린 정치인들의 민낯을 보며 또다시 실망에 빠진 백성들. 설공찬전이 바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지 않았을까요?

어명을 내려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상황도 눌러놓고 몰래 베껴서 돌려 읽을 만큼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했던 작품이었죠. 일제 해방 후 평안을 기대했던 우리 민족에게 실망을 주었던 대한민국 역사의 뿌리처럼... 그래서 번복되는 드잡이판의 현실처럼... 설공찬전은 오늘날의 이러한 드잡이판 정치세계를 비판하는 오백 년 전 간언은 아니었을까 짚어봅니다.




글, 사진 = 전예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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