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삼진의거의 함성이 머문 곳 - 애국지사 사당
8월 15일은 제78주년 광복절입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창원 독립운동가들이 숨 쉬고 있는 애국지사 사당에 발걸음을 놓아봅니다.
이곳에는 기억해야 할 지역 역사 삼진의거의 함성이 머문 곳이니까요.
애국지사 사당을 찾아가는 삼진의거대로에서 애국지사들의 찬란한 이름이 새겨진 배너기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깊은 뜻을 합창이라도 하듯 우렁차게 펄럭이는 배너기의 행렬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애국지사 사당에 도착했습니다.
요즈음 문화시설에 방문하면 주차난과 날씨가 더워서 다니기가 불편한데 애국지사 사당은 깨끗하고 넓은 주차장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푸른 초록 나무들이 신선한 공기를 내뿜어 그늘도 만들어 주고 숲에 온 듯 공기가 맑고 시원하네요.
이제 차근차근 애국지사 사당이 어떤 곳인지 탐독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애국지사 사당은 일제강점기 때 조국의 국권회복 항일투쟁에 몸 바친 독립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해 2008년도에 건립되었습니다.
숭절사를 중심으로 전시관, 관리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숭절사는 94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전시관에는 애국지사 유품, 독립운동 활동 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관리동에서는 애국지사 사당의 전반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곳이 천안에 있는 독립 기념관이라면 우리 지역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곳이 진전에 있는 애국지사 사당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이곳 삼진 지역 진전, 진북, 진동 3개면은 대표적인 항일 민족운동의 고장입니다.
1차 1919년 3.28일과 4.3일 2차에 걸쳐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고 이를 삼진의거라고 합니다. 2차 의거가 규모나 희생이 훨씬 더 커서 4.3독립만세운동이라고도 합니다. 삼진의거는 선진적 애국사상을 가진 항일 인물들이 7,000여 명의 농어민들을 광범위하게 조직적으로 규합 동원한 항거입니다.
삼진의거로 인하여 8분의 애국지사가 현장에서 순국하시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고 혹독한 고문과 태형, 징역형을 받은 곳입니다.
삼진의거는 2차례에 걸쳐 순수 농어민 등 많은 참여자에 의해 계획되고 조직화된 만세운동이라는 점에서 전국의 4대의거 (수원 제암리, 황해도 수안읍, 평북 선천읍) 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삼진의거의 숭고한 정신은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의거, 부마 민주항쟁으로 그 정신이 계승 발전되어 오고 있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숭절사(애국지사 사당)부터 진입해 보겠습니다.
숭절사로 진입하는 현판에 '경앙문'이라는 글씨체가 보이죠? 이것은 우러러보고 존경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자랑스러운 애국지사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느니 정말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숭절사로 진입하는 문은 3개의 문이 있는데요. 가운데 문은 특별한 제례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잠겨 있습니다.
동입서출로 능, 향교, 사당 등의 출입 시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서쪽 (왼쪽)으로 나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숭절사에는 현재 창원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94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방문했을 때는 91분이었는데 1년 사이에 3분이 서훈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숭절사 봉안된 애국지사들의 서훈(대한민국에 뚜렷한 공적을 세운 자에게 훈장과 포장을 수여하는 것)은 맨 밑 좌측에서 우측으로 독립장 3분, 애국장 11분 그 외는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 순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94위의 위패를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해 독립장을 받은 이교재, 이윤재, 주기철 지사 3분의 이야기를 잠깐 들려 드리겠습니다.
상해임시정부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그렇죠. 김구 선생이 가장 먼저 생각나시죠. 이교재 선생은 김구선생과 함께 상해임시정부에서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3번을 오가며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으나 감옥에 4번이나 수감 되었다가 46세에 순국하셨습니다. 숨을 거둔 곳은 집이었지만 몸 상태가 위중해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니 옥사입니다. 이교재 선생은 전시관에서 유품을 통해 다시 다루겠습니다.
영화 '말모이' 봤나요? 그 말모이 영화에 조선어학회가 나오죠. 이윤재 지사는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시도하다 감옥에 체포되어 투옥하다 순국하신 분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1930년 민족 말살 통치 때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에 항거하다 순국하셨습니다. 진해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으니 그곳을 방문하면 더 많은 업적을 알아볼 수 있겠지요.
참배를 하고 나오는데 숭절사 뜰이 참 평화롭습니다.
이 고즈넉한 뜨락에서 그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떠 올리며 그날의 함성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애환과 마음이 가득 담긴 자랑스러운 태극기의 청창한 기백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봅니다.
이제 전시관에 들러 애국지사 유품, 독립운동 활동 모형을 통해 삼진의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태극기입니다. 태극기를 보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독립만세운동, 국경일, 올림픽, 축구, 건곤감리 등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죠? 애국지사 사당에 있는 태극기라서 그런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염원했을 그 순간이 그대로 그려지지 않나요? 온몸에 전율하듯 그들의 절규하는 함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애국지사 사당 전시관 입구에는 1919년 그날의 함성을 느끼며 내 고장 독립만세운동지로 떠나는 역사탐방 리플릿을 비치하고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애국지사 사당 소속 마산합포구청 복지과에서 발매한 이 소책자에는 삼진의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니 방문 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전시관에는 1899년 마산포 개항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까지 지역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기록이라 구체적인 사실을 낱낱이 알 수는 없지만, 사실과 해석 사이의 긴장을 배제하고 전시관에서 발췌한 것을 토대로 1차와 2차로 나누어 정리해 봅니다.
삼진의거의 주동인물은 변상태 지사입니다.
1차 의거는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변상태 지사가 고향인 진전에 내려와 경행재(민족교육의 요람, 많은 애국지사와 학자를 양성 배출) 교사 권영대 지사와 그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지사들과 만세운동을 부르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를 성구사(초계 변씨의 재실로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하고 의거를 준비한 곳)에서 거사를 논의합니다.
3월 28일은 고현에 5일 장이 서는 날이었습니다. 당시 고현장은 지금의 고성과 동해면까지 아우를 정도로 많은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는 큰 장이었습니다. 3월 28일 오후 1시에 20살 백승학 지사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권영대 지사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칩니다.
순식간에 600여 명의 군중이 모이고 일본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으로 향합니다. 아무런 무기 없이 평화롭게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향해 일본군은 총과 칼로 위협했고 그 과정에서 11명이 일본군에게 체포당합니다.
1차에 실패했으니 2차를 준비해야겠죠. 2차 의거를 위해 변상태, 권영대 지사 등은 몸을 피해 후일을 도매하게 되는데 이렇게 격문과 세부계획에 따라 아주 친밀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2차의거 또한 4월 3일 (음력 3월3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날로 잡았습니다. 음력으로 3월 3일 삼짇날은 봄을 맞아 농사의 시작과 한 해의 건강과 평안을 비는 날로 우리 조상들에게는 큰 명절 중 하나였습니다.
4월 3일 오전 9시 진전면 양촌 일암 마을 앞 하천변에 2,00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모였습니다. 변상섭 지사가 대형 태극기 밑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 지사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 를 외칩니다. 그리고 장사였던 김수동 지사가 선두에서 대열을 이끌고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진동쪽으로 나아갑니다. 진전에서 시작해 진동으로 가면서 7,000여명까지 늘어납니다.
오후 2시쯤 마침내 사동교에 도착하고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 30여 명의 시위대의 위협에 누구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당시 42세인 김수동 지사가 성난 사자처럼 돌진합니다. "너희가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의 피를 빨아먹으니 우리의 불공대천원수다." 라고 외치며 일본 헌병의 목덜미를 잡아올려 다리 아래로 던져 버립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총을 발사하고 김수동 지사는 가슴에 붉은 피를 흘리며 장렬히 순국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변갑섭 지사가 김수동 지사의 태극기 장재를 집어 들고 다시 일본군에 돌진하여 헌병 대장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하지만 다른 헌병이 휘두른 일본도에 팔이 잘리며 지사 역시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일제의 무차별 총탄 세례를 받고 시위대는 1시간 여만에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왜놈들의 주구인 헌병보조원이었습니다. 이 주구들이 앞장서서 동족의 가슴에 총탄을 퍼부으니 주동자 김영환 지사가 총탄에 쓰러지며 "나를 죽인 놈은 심의진이다. 나의 원수를 갚아 달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유언입니까!
이때 8분(김수동, 변갑섭, 홍두익, 고묘주, 김영환, 변상복, 이기동)이 순국하셨고 22분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존경하는 이분들을 기리기 위해 팔의사 묘역, 팔의사 창의탑이 건립되었습니다.
지금, 이라크와 러시아가 긴 전쟁의 길목에 놓여있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러시아 군인들은 앞다투어 망명을 하고 있지만, 이라크는 여자들까지도 군에 입대를 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앞장서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8의사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제 이교재 선생에 대해 살펴볼까요?
이교재 선생은 1910년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3월 도내 일원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는 등 지방 독립운동의 선도자입니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모금과 국내 연결책의 밀명을 받아 ‘칼톱회’ 라는 조직을 만들어 국내 동향을 상해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교재 선생하면 떠 오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교재 위임장 및 상해격발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교재 위임장(왼쪽)은 이교재 선생을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한다는 문서이고, 상해격발(오른쪽)은 이중광을 특파원으로 임명한다는 문서입니다. 1930년 전후로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내와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위임장을 지키기 위해 부인 홍태출 여사는 석양이 닥칠 때는 반드시 오리라는 장한 뜻과 굳은 신념으로 불안한 이 지령서를 지키기 굴뚝 속이나 밧줄에 묶어서 우물 속에 어떤 때는 부녀자의 월경대로서 일가일분도 머릿속에 떠날 일 없이 심적 고통을 겪어오며 지켜냈다고 합니다.
애국지사 사당에는 이렇게 해석본이 비치되어 있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꼭 알아야 할 부분은 진한 글씨체, 빨간 글씨체로 표기해서 더 선명하게 들어 옵니다. 지령서를 살펴보면 "타도일본" 중의 "日"자는 옆으로 뉘어 놓았고 "本" 자는 위아래로 거꾸로 놓아 일본을 붕괴시키겠다는 독립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애국지사 사당에 방문하여 살펴보기를 적극 추천드립니다.
애국지사 사당 부근에 있는 '죽헌로' 는 이교재 선생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이교재 선생의 묘역이 있습니다. 해방 후 김구 선생께서 진전에 오셔서 초라한 묘소를 보고 '죽헌 죽헌' 부르며 그렇게 우셨다고 전해집니다. 그 당시 지금의 임곡리에 있는 묘자리를 정해 주셨다고 합니다.
초라했던 선생의 묘소를 1954년 마산일보(현 경남신문) 김형운 사장이 열사의 우국충절을 기리고자 추모회를 조직하여 지역 유지의 협찬과 각급 학교 학생들의 헌금으로 지금의 임곡리에 묘소를 옮기고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1963년 3월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열사의 거룩한 넋을 위로했습니다. 애국지사 사당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으니 둘러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허당로를 아시나요? 마산 6호 광장에서 용마고등학교 쪽으로 나 있는 도로명인 '허당로'는 명도석 지사의 호를 딴 도로명입니다. 허당 명도석 지사는 당시 마산지역을 주름잡던 사업가였습니다. 단순히 사업만 하신 것이 아니라 야학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고, 특히나 무산층의 여성 교육에 힘쓰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신간회 설립에 앞장섰고 광복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지역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직후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고 독립지사들이 외면당하는 세태와 이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쓴 시입니다.
음침한 바다 나쁜 기운을 밤이 되니 물러가고
파도 자고 바람 그친 맑은 날 오니 길 떠나기에 좋은데
열상의 마음은 산처럼 무거웁고
부생들의 자취는 터럭처럼 가볍다.
삼월 꽃나무에는 제비가 날고
사월 숲속 샘터에는 꾀꼬리 소리 즐거운데
보잘 것 없이 여기 남은 부끄러움 어찌 말로 다할까.
미친 듯 노래하고 어지러이 춤추는 내 마음이여
애국지사 사당에는 청화한 4월 시만 전시를 하고 있지만, 마산부림문화광장에는 허당 명도석의 흉상과 더불어 한시 3편(청화한 4월, 가을날의 산에서, 한 겨울 추산에 올라)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패널에 부착된 사진으로 이교재, 변상태, 명도석 지사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애국지사 사당 관람을 추천드립니다.
104년 전에 일어났던 삼진의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삼진의거가 일어 날수 있었던 것은 4.3의거 당시 앞장서서 만세를 외치다 희생한 8의사, 의거 준비를 하면서 기꺼이 재실(경행재, 성구사)을 내어주고 후원을 해 주었던 지역 유지분들, 부상자를 치료(김형철 청년 의사 무료치료)했던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관리동에서는 애국지사 사당의 전반적인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애국지사 사당은 우리나라 고유의 한옥 건물이라 지나가다가 한옥 카페인 줄 알고 들렀다 지역사가 숨 쉬고 있는 것을 알고는 반가워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애국지사 사당에는 우리나라 꽃 무궁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무궁화 동산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애국지사 사당에는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나무란 뜻을 지닌 배롱나무도 피어 있습니다. 겨울이면 죽은 듯이 서 있는데,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고, 배롱나무를 보면 그저 기특해서 한참을 어루만집니다. 우리 민족이 혹독했던 일제강점기를 이겨내고 독립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애국지사 관람 시간 안내
√ 하절기(3월~10월): 오전 10시~오후 5시
√ 동절기(11월~2월):오전 10시~오후 5시
√ 휴관일: 1월1일, 설, 추석 연휴
우리 지역에서 삼진의거(4.3만세운동)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관람시간을 참조하여 우리 지역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애국지사 사당에서는 삼진의거 유적지 교육 및 환경정화 활동 참여로 봉사활동 시간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학생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초등학생에서 대학생까지 가능합니다.)
삼진의거 유적지 현황 탐방코스는 이 안내지를 참고하면 됩니다. 유적지들이 가까운 위치에 배치되어 있어 동선이 짧습니다. 2시간 코스는 애국지사 사당을 관람하고 이교재 선생 묘역을 참배하면 됩니다. 4시간 코스는 2시간코스+유적지 2곳을 더 방문하면 됩니다. 4시간 코스를 선택하되 7군데를 두루 살펴보기를 추천합니다. 그래야 삼진의거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아직 애국지사 사당이 있다는 것을 잘 몰라서 관람객이 적은 것 같습니다.
모르고 있었던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하는 우리 지역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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