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시간을 보낸 오후

석탄정

석탄정에 도착했을 때,

저는 먼저 발걸음을 늦췄습니다.

정자라는 공간은

늘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기둥과 서까래가 만드는 선들의 규칙성,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곡선의 완만함,

그리고 바닥의 단단한 촉감이 차분함을 부릅니다.

젊은 여행자로서 빠르게 이동하는 데 익숙한 제 몸은,

이곳에 앉는 순간 속도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나무, 멀리 이어지는 능선의 윤곽이 레이어처럼 포개져,

화면을 구성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알려 주었습니다.

정자에 앉아 가만히 바람을 맞으면,

공간의 소리가 먼저 들립니다.

물이 낮게 흘러가는 소리, 갈대가 스치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새의 울음. 도시에서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 대신,

이곳에서는 자연이 배경음이자 리듬 섹션이었습니다.

석탄정에서의 시간은

사유의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정자 난간에 팔을 올리고 멀리 숲을 바라보면,

최근의 분주함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저는 메모장에 요즘 진행 중인 작업의

아이디어를 간단히 적어 보았습니다.

이곳의 선과 여백, 바람과 그림자의 움직임은

영상 편집에서 컷과 컷 사이의 호흡을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한 힌트를 주었습니다.

빠르게 전환하는 대신,

미세한 변화를 느끼게 하는 길이의 조절.

그런 리듬을 여기서 배웠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빛의 각도가 변했고,

정자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습니다.

이 순간이 사진으로 담기 가장 좋았습니다.

나무기둥의 질감이 선명하게 살아나고,

바람이 잠깐 멈출 때 셔터를 누르면

미세한 흔들림 없이 고요가 고정됩니다.

정자 내부 그늘과 바깥의 밝은 풍경이 대비를 이루어,

자연스럽게 얼굴에 부드러운 라이트가 형성됩니다.

삼각대가 없어도 난간을 살짝 지지대로 쓰면 흔들림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정자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며

발걸음을 들꽃 사이로 옮겼습니다.

색이 강하지 않은 작은 꽃일수록

사진에서 깊이를 주는 배경이 되었고,

낮은 시선에서 촬영하면 정자가 더 웅장하게 서 보였습니다.

정자의 소리와 노을의 빛,

그리고 미세한 바람이 그 자체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돌아나오는 길, 저는 오늘의 감상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석탄정은 새로운 체험을 ‘추가’하는 곳이라기보다,

젊은 여행자로 말하자면,

이곳은 과장이 없이도 진정성이 자연스럽게 기록되는 공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새벽의 빛으로 같은 풍경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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