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시간 전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8코스ㅣ부산의 젖줄 낙동강, 그 속에 남겨진 유통과 상업의 자취
강과 바다, 물길 따라 흩어져 있는
부산 역사 문화유산
그 내력과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온라인 답사기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여덟 번째 코스로
"부산의 젖줄 낙동강, 그 속에 남겨진 유통과 상업의 자취"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8 코스 |
구포왜성 ▶ 북구문화예술회관 ▶ 구포은행 ▶ 구포역 구포만세 테마거리 ▶ 구포다리 ▶ 삼락재첩거리 ▶ 하단포구(황포돛배) |
코스 8ㅣ부산의 젖줄 낙동강,
그 속에 남겨진 유통과 상업의 자취
낙동강은 부산의 젖줄이다.
전근대 시기부터 이곳의 경제와 문화를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영남지방의 물산과 세곡 등의 운송로로 이용되었다.
근현대를 지나면서는 낙동강 수운에 더해 경부선이 강을 따라 부설되어 유통과 상업이 더욱 번성하였다.
여기저기 잘려 나가다
구포왜성
사통팔달 요충지에 쌓은 왜성 |
임진왜란 발발 후 파죽지세를 구가하던 왜군은 명의 참전과 조선의 반격으로 동남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강화교섭에 나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장기 주둔을 위해 왜성을 쌓았다. 왜성은 부산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에 쌓았는데 주로 본국과의 연결이 용이하고 방어에 유리한 해안 근처의 낮은 산 정상에 위치했다.
이에 더해 내륙과 이어진 낙동강 수로의 확보 및 차단을 위해 낙동강 하류인 김해·양산·구포 등지에도 왜성을 쌓았다.
왜구를 막아내 의로운 성이라 불리던 곳에 왜구의 후손인 왜군이 성을 쌓은 것이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구포왜성은 또한 구포의 옛 이름인 ‘감동진(감동포)’ 뒤에 자리하여 감동포성이라고도 불린다. 감동포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다.
북구의 상징 거북이와 구포 |
지금은 고속도로 위로 멋진 구름다리가 놓여서 손쉽게 구포왜성에 갈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4월에 지어진 이 다리의 이름이 ‘북이희망교’이다. 거대한 다리의 상판이 흡사 거북이 등 같이 생겼다.
혹시 북구의 캐릭터를 아는가? 거북이를 형상화한 ‘북이’이다. 왜 거북이가 북구의 캐릭터냐고? 북구의 시작이자 중심지가 구포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구포를 한자로 쓰면 龜浦이다. 지명에 ‘龜(거북 구)’ 자가 들어간 것은 옛사람들이 구포쪽으로 뻗은 금정산의 한 줄기를 보고서 마치 낙동강을 향하여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거북이의 모습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식 성의 전형 구포왜성, 그러나 … |
구포왜성은 접근성이 좋으며,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다. 최대 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다. 성벽의 형태는 전형적인 일본식 성으로 비스듬히 경사지게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혀지게 쌓았고, 모서리 부분은 직사각형 대형 석재를 가로와 세로로 어긋나게 쌓아서 견고하게 만들었다.
성 안에는 장수의 지휘소인 천수각이 있던 자리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부산진왜성과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일본
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1972년 6월 26일 부산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성의 최상단부인 천수각 자리로 가려면 성벽을 반 바퀴 돌아 북측 성벽으로 들어가야 한다. 북측 성벽은 상대적으로 훼손이 심하다. 평평한 곳은 낙동강에 접해 있어 배를 댈 수 있었으나 경부선 철도와 양산으로 가는 국도 35호선이 건설되면서 강변쪽의 성도 잘려 나갔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구포은행
구포의 상업 발전이 학교 설립으로 이어지다 |
낙동강은 지리적·문화적으로, 또 행정적으로, 때론 국경으로 다양한 경계 역할을 했다. 경계는 단절과 소통이라는 상반된 두 개념이 공존한다. 고대 신라와 가야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교류하고 대립했다.
구포는 내륙 수운과 해양 수운이 교차하는 지점이라 오래전부터 영남 지방에서 모아들인 세곡과 물자들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들이 설치되었다. 상인들은 단지 돈을 버는데 머물지 않고 이제는 지역의 유지로서 근대적인 학교와 은행 설립에도 투자하여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 탄생 |
구포의 유지들은 학교 설립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자본주의적 경제질서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에도 힘을 쏟았다. 1905년 단행된 화폐(재정)정리사업 이후 조선 상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안은 일본 자본과 경쟁하기 위한 상업자본의 확보였다. 상업자본 조달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은행의 설립이었다. 은행경영은 성숙한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중심 과제이기도 했다.
윤상은을 중심으로 구포의 유지들과 인근 지역의 상인·지주들은 1909년 1월 15일 구포시장에서 구포저축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약 한 달 뒤인 2월 11일 67명이 합자하여 자본금 25만 원으로 ‘구포저축주식회사(구포저축)’를 설립하였다. 구포저축은 우리나라 사람이 설립한 최초의 지방금융기관이었다.
구포저축에서 구포은행으로 전환 민족자본 형성의 실패 |
구포저축에서 구포은행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부산의 상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영업의 범위가 구포 지역을 넘어 부산으로 확대되었다. 영업 방향이 구포 지역의 발전에서 도시의 상업 이윤을 공유하는 쪽으로 변화하게 되자 1915년에는 ‘경남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점을 아예 부산 초량으로 이전하였다.
은행 경영진 역시 구포 사람이 아닌 부산 사람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은 구포를 중심으로 한 민족자본의 기반이 부산의 일본 자본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하고, 이는 곧 일본 자본에 대응하기 위해 민족자본을 키우려 했던 구포저축의 애초 목표가 좌절되었음을 의미했다.
100년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당시의 은행 건물이 남아있지는 않다. 대신 그 자리에는 다른 은행이 여전히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우리은행 구포지점이다.
구포만세 테마거리
구포역
부산역 버금가는 구포역 |
구포역은 1905년 1월 1일 개통한 경부선의 기차역으로 지어졌다. 경부선이 비록 일본의 침략정책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부설되었지만 국토의 대동맥으로서 경부 축의 여객 및 화물 수송 능력을 대폭 향상시켰고, 남한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주요 도시를 연결해 시간 거리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구포역은 1903년 11월 1일 완공되었으며 경부선이 개통되던 1905년 1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구포역을 통해 일찍부터 낙동강 수운으로 통행하던 밀양, 대구 등 영남 지역과의 접근성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부산과도 더욱 가까워졌다.
부산역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열차는 구포역에 정차하여 서부산권 승객들을 태웠다. 서부산 주민 외에 동래나 김해·양산 주민들도 대구, 대전, 서울 등지로 가기 위해서 주로 구포역을 이용했다. 그래서 구포역은 오랫동안 부산역만큼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최악의 철도 사고 |
구포역과 주변 상권의 쇠락은 곧장 안타까운 기억으로 연결된다.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경, 서울역을 출발하여 부산역으로 가던 무궁화호 제117 열차의 기관사는 구포역을 약 700~800m 남겨두고 선로가 내려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급하게 비상제동을 시도하였으나 빠른 속도로 달리는 육중한 쇳덩이를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결국 기관차와 발전차, 객차 3량 등 총 5량의 열차가 탈선·전복되면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승무원과 승객 78명이 목숨을 잃었고 19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를 넘어서는 최악의 철도 사고였다.
구포장과 만세운동 |
구포만세길에는 3·1운동 때 구포장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이 길을 정비하여 테마거리를 조성되어 있다. 길 곳곳엔 구포장터 만세운동 안내문과 관련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벽에는 그날을 재현한 그림들이 멋지게 그려져 있다.
1919년 전국으로 확대되던 3·1운동의 소식이 구포 지역에도 전해져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1,200여 명이 대규모 만세운동을 벌였다.
기억하나요
구포다리
구포와 대저의 입장 차이 |
1682년 구포에 조창(漕倉, 세금으로 걷은 곡식의 수납·보관 창고)이 설치되었다. 구포의 옛 이름인 감동진에 설치되었다 해서 ‘감동창’ 혹은 낙동강 최남단에 있다고 해서 ‘남창’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 경상도에서 거둬들인 세곡은 낙동강을 통해 조창에 모여서 남해 연안을 따라 전라·충청도 해로를 거쳐 서울로 옮겨졌다.
조창이 설치된 이후 감동진은 상주의 낙동진과 함께 낙동강 물류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감동 나루터 인근에 시장이 서고 개항 이후에는 경부선 구포역과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인 구포은행이 설립되는 등 구포 지역의 물류·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은 높아져만 갔다.
반면에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구포와 마주 보고 있던 대저 지역은 문제가 많았다. 낙동강과 서낙동강 사이의 삼각주 지역에 있는 대저는 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제한적이었다. 구포를 오가는 데 따른 불편과 불만이 날로 커지자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구포와 대저 사이에 다리를 놓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구포다리 건설로 나타난 변화 |
1933년 3월 7일, 대저와 김해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건설된 구포다리의 준공식이 대저 들판에서 이루어졌다. 원래는 준공식을 구포에서 열 예정이었으나, 공사비도 부담하지 않고 다리 건설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구포에 대한 대저 사람들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구포다리 개통 후 구포는 상업 경기가 다소 쇠퇴하기는 했지만, 기존의 경부선 철도에 더해 구포다리로 말미암아 명실상부한 육상교통의 요지로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사상공단과 김해, 창원 등지의 산업 물자 수송로로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다리였다.
노후화, 붕괴 그리고 철거 |
구포다리는 지반이 약한 낙동강 하류 퇴적지형에 건설한 탓에 노후화가 빨리 진행됐다. 특히 1959년 한반도 남부를 강타한 태풍 ‘사라’는 치명적이었다. 교각의 침하가 진행되어 10년간 보수공사가 이뤄졌으며, 1987년부터 2.5t 이상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2003년 9월 14일 부산을 할퀴고 간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19번째 교각이 유실되고 15m에 달하는 상판 4개가 무너져내리면서
다리의 기능을 상실했다.
낙동강 재첩국과
삼락재첩거리
재첩이 재첩인 이유 |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인 재첩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먹어 온 조개류이다. 재첩은 단백질이 많기로 소문난 두부보다도 더 높은 단백질 함량으로 영양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재첩이란 말이 어디서 왔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번식력이 좋아 하룻밤에 부인(첩)을 두 번 본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낙동강 하구의 명지, 하단, 엄궁에서부터 사상, 구포를 넘어 물금, 원동에 이르기까지 널리 채취했을 정도로 생장분포가 광범위했고 개체 수도 많았다.
재첩거리의 조성 |
‘삼락재첩거리’에 가면 부산에서 제대로 된 재첩국을 맛볼 수 있다. 재첩국집은 네 곳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재첩국을 주문하면 비빔밥과 고등어조림이 함께 나온다. 비빔밥의 매콤함과 고등어조림의 짭조름함이 다소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재첩국과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사상구립박물관인 ‘사상생활 사박물관’에도 재첩의 자취가 있으니 한번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낙동강 황포돛배 종착지
하단포구
하단의 성장과 쇠락 |
칠백리 낙동강이 끝나는 곳, 그래서 이름도 ‘아래치’ 혹은 ‘끝치’라 불리던 하단(下端)은 지리적으로 강과 바다를 모두 끼고 있어서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기 좋기로 유명했다. 특히 포구가 발달하여 조선 후기에는 낙동강 수운을 통해 운반된 영남 내륙의 세곡과 물자가 남해안과 서해안을 통해 서울 등지로 보내지기 전의 기착지로서 물류의 중심지로도 번성했다.
개항 후 하단에는 정미업 및 쌀 도·소매업이 발달했고, 특히 객주업이 크게 번성하여 구포와 함께 낙동강 하류 물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렇게 상업항으로 성장하여 잘나가던 하단이 몇 차례의 변곡점을 거치며 그저 그런 동네로 전락하게 된다. 첫 번째 변곡점은 철도를 놓으려다 실패한 일이다.
하단포구와 황포돛배 |
하단포구는 원래 구덕산 옆 시약산 싸릿골에서 시작해서 괴정동과 당리동 일대를 가로질러 낙동강으로 흐르던 괴정천 하구에 있었다. 하지만 낙동강하굿둑이 건설되면서 포구 일대가 매립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하단오거리(또는 1호선 하단역)에서 신평 방면으로 큰길(하신중앙로)을 따라 700m 정도 직진하면 가락타운 3단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햇님공원이라는 어린이놀이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원래 하단포구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주변이 온통 아파트와 건물들로 가득 차 있어서 포구였던 사실을 알기 어렵지만 놀이터 한쪽에 ‘하단포비’가 커다랗게 세워져 있어서 이곳이 예전에 포구였음을 알게 해준다.
하단 도선장의 추억 |
황포돛배는 낙동강을 건너는 주민들의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하단장에 나온 명지·녹산 주민이나 을숙도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하단포구의 도선장(하단선창)에서 이 돛배를 탔다. 승객을 태운 나룻배는 하단을 출발해서 을숙도 선착장을 거쳐 을숙도와 일웅도 사이의 샛강을 가로질러 명지로 오갔다.
오랜 세월 이 지역 사람들의 충직한 발이었던 돛배지만 근대화·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단 도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돛단배에서 엔진을 장착한 큰 배로 도선이 교체가 되었다. 도선운행에 많은 문제가 생기며 기능을 차츰 잃어 갔다. 겨우 이름만 남은 도선장도 1980년대 들어 낙동강하굿둑을 건설하면서 그 일대가 매립되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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