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전
[명예기자] 겸재 정선의 숨결 따라 걷는 길 ; 강서역사문화거리 탐방기
한여름의 햇빛이 구름에 가린 휴일 오전. 손목닥터9988을 찬 채,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내려 ‘겸재 정선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강서역사문화거리를 걸었다. 총 6,374보, 약 1시간에 걸친 길 위의 역사 여행. 칼로리 소모량은 212.47kcal.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이 가슴에 남았다.
🌸 양천향교 – 조선의 교육 정신을 만나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마주한 양천향교는 조선 시대 향촌 사회의 중심이자, 지방 유생들이 학문을 닦던 공간이다. 유교적 가르침의 중심에 있던 이곳은 마치 시간의 문을 통과한 듯 고즈넉했다. 붉은 외삼문을 지나면 보이는 명륜당과 대성전은 목재의 단정한 선과 비례미로 그 시대의 정신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유생들이 걸었을 마당을 따라 걸으며, 나 역시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게 된다.
🌿 궁산근린공원 – 나리꽃과 피톤치드의 향연
양천향교를 뒤로하고 나선 길은 궁산근린공원으로 이어졌다. 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핀 숲길은 싱그러운 피톤치드로 가득했다. 고운 분홍빛 꽃잎 사이로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의 뜨거움을 잊게 했다. 삼림욕을 하며 천천히 오르다 보니 도시의 소음이 뒤로 멀어지고, 자연의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 소악루(小岳樓) – 겸재 정선의 시선이 머문 정자
궁산 근린공원을 따라 오르다 보면 숲속에 자리 잡은 단아한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소악루다. '작은 산에 세운 누각'이라는 뜻의 이 정자는 조선 후기의 대표 화가 겸재 정선이 자주 찾았던 장소로, 그가 한강 일대를 담은 진경산수화를 그릴 때 영감을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무 기둥과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아담한 구조는 고요하고 겸허한 기운을 풍긴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겸재의 눈으로 보면, 멀리 흐르는 한강과 근처의 능선, 강서 일대의 풍광이 그대로 캔버스 위로 옮겨졌을 것이다.
소악루의 처마 밑에 서서 잠시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풍경을 감상하면, 마치 겸재와 조용히 그림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겸재의 예술혼이 깃든 곳, 그가 세상을 바라본 시선을 잠시 빌려볼 수 있는 장소다.
🏰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 – 한강을 지키던 군사 요충지
소악루에서 조금 더 올라 궁산 정상에 이르면,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감도는 유적지에 닿는다. 바로 양천고성지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략적 거점으로 사용되었던 군사 요충지로, 한강 하류의 방어를 위한 성곽이 자리했던 곳이다.
지금은 성벽의 흔적만이 남아 있지만, 발아래 펼쳐지는 한강의 유려한 풍경을 바라보면 왜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는지 단번에 이해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와 한양을 잇는 길목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 망동산터 – 커다란 붓에 새겨진 정신
정상에서 내려오다 보면 망동산터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겸재 정선의 예술혼을 기리는 커다란 붓 조형물이 우뚝 서 있다. 전통과 예술, 창의의 상징인 그 붓은 이 거리 전체가 하나의 큰 화폭임을 암시한다. 이정표 같은 붓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르고, 사진 한 장을 남긴다.
🧊 궁산땅굴역사전시관 – 강서의 숨겨진 역사
길을 건너면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궁산땅굴역사전시관이 나온다. 1970년대 반공 훈련용으로 조성된 땅굴은 이후 역사교육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과거의 군사적 긴장감이 지금은 평화를 배우는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한걸음 한 걸음이 무겁고도 값졌다.
🖼 겸재정선미술관 – 진경의 미학을 만나다
마지막 목적지는 바로 겸재정선미술관. 그의 대표작인 「경교명승첩」「금강전도」 등을 디지털로 체험하며, 조선의 산천을 어떻게 민족적 시선으로 그려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양천, 중년의 금강, 노년의 북한산까지…. 겸재의 붓끝을 따라 대한민국의 산하를 여행한 기분이었다.
오늘 걸은 길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조선의 정신과 자연, 예술이 하나로 녹아든 문화적 순례길이었다. 손목닥터9988은 숫자로 이 여정을 기록했지만, 마음은 그 이상을 간직했다.
이 길을 걸으며 문득, 겸재 정선이 이런 풍경 속에서 붓을 들어 그림을 남긴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노을이 지는 시간에 다시 걸어보리라 다짐하며, 다시 양천향교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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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까치뉴스 이상돈 명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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