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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근본은 국리민복 문성공 팔송 윤황선생 묘소와 재실
오늘은 논산시 노성면에 자리한, 정치의 근본은 국리민복이라고 한 문성공 팔송 윤황선생의 묘소와 재실을 소개합니다.
기호유학의 중심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문성공 팔황 윤황선생고택 탐방을 마치고 정겨운 시골길을 조금 걷다 보면 아주 멋진 소나무가 모습을 보입니다.
40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고 살아온 이 소나무는 2007년 논산시 보호수인데요.
소나무 아래에는 이렇게 보호수 지정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5월 6일 처음 방문했을 때의 문정공 팔송 윤황선생 묘역 일원 모습입니다.
이곳에는 토종 으아리를 비롯해 산제비란이 자생하고 있기도 한데요.
잘 찾아 보면 보기 드문 식물들을 볼 수 있으니 보물 찾기를 한번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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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팔송 윤황(尹煌, 1572~1639년)의 본관은 파평,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 ·노곡(魯谷)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입니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습니다.
팔송 윤황 선생의 묘비는 높이 228.5cm, 너비 113.0cm, 두께 32.0cm 입니다.
이 비는 1660년경 건립된 윤황묘비(尹煌墓碑)로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지었고, 아들인 윤순거(尹舜擧)가 글씨를 썼다고 알려졌으며 누가 각자를 했는지는 모릅니다.
묘비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는데요.
尹煌 墓碑
논산문화원 발행 금석문대관
(篆 額)
大司諫尹公墓碑銘
(碑 文)
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諫院大司諫尹公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金尙憲撰
嘉善大夫行司諫院大司諫兼同知成均館事金壽恒篆
故大司諫八松尹公者坡平人剛毅有大節自少力學篤行常懷經世志數上書論事皆國家所以安危在亡之故然終於無所合以卒余嘗論天之生材若有意於用世而合者少不合者多或始進而終攘或貌悅而心忌生不能益於時死乃有名於後仰何歟不肖之徒懷奸誤國而處高位享厚祿者肩相磨獨賢者忠者常疏遠不親而反有視之若仇怨嗚呼豈盡天意耶崇禎九年二月公遇災上疏其略曰今日之天怒極矣擧國之人遑遑汲汲而 殿下深居九重群臣無敢見者上下沓沓莫之知懼自古安有如此而國不亡者乎夫承弊政者不加守常道拘小節者不能成大業今日若不大警動大作爲痛革因循之習則必無救於亂亡之禍也臣前日請停 廟樂非不知廟樂之難撤然而必廟樂爲言者廟樂旣撤則 御膳必不求甘御服必不求美內努內需不得不出宦官宮妾不得不減進上可罷貢獻可除推此以往則百爲浮費一切蠲省而轉危爲安在此一着也何以言之今日啚存之策只在保民與養兵 祭享御供一倣中朝之制罷外貢而市買以用如太官之瓷窯漁箭尙方之織造工作並皆停罷以法土簋藜羹短褐之盛德宮嬪板房用復故制以省收布供薪之費此外凡所以節儉省約者皆自 聖躬始內以勳戚所占公田山澤之利諸司大小私俸之濫一歸之度支外而各營列郡暴歛亢費苞苴饋獻之類次第釐革則財用有道而民得蘇息矣臣聞八道墾田五十餘萬結度支歲賦米不下十四萬碩恒費居三之二用其仂以代常貢必有餘裕稅外凡徭旣盡除然後一結田賦五斗米一匹布以爲養兵之資食不足不患矣又就諸道軍額簡其精銳擇其將領贍其衣食習其技藝明其賞罰勝兵可得十萬兵不足不亦患矣三月又上疏曰醜容肆然以惡逆加於我旣不售而歸若不甘言愚我必鴟張豕突懼我以兵不及此時竭力自强一朝倉猝終未免聽其所爲則今日之抗義適足爲空言實禍之歸今之急務莫先於輕徭溥賦慰悅民心臣之前疏所陳者是也願 殿下亟下哀痛之敎使八方曉然知 殿下大有爲之志然後親御國門日討軍實而申儆之勿復爲燕安姑息之計所撓奪也八月又上箚曰臣之前日所言陰雨之備也今則禍機已迫燃眉之急也請 殿下先發宮掖近習之少壯者次發宗室百官之才俊者次發儒生次發吏胥次發市民次發公私賤則國都之中可得數萬人四方選兵亦用此道先發豪門盛族後及小民則孰敢怨咨孰敢規避如是則十數萬精兵不勞可得罷備邊司而去遙制之害撤江都之備焚行宮而進駐平壤以示必戰無退避之意則忠義之士籯糧景從兵不徵而自集食不求而自聚軍容盛壯風采立變孰與畏約無窮卒以禍終哉此皆人所不敢言而公獨盡言不諱其終始懇懇之誠不啻墮肝瀝膽而聽之邁邁訖無見行是年冬虜果傾國入寇國家之辱生民之禍盡如公言尙不悔悟乃有訾公先爲不祥語以讖大禍者嗚呼人也非天也公諱煌字德耀八松其號也高麗太師莘達之後五世至文肅公瓘寔生文康公彦頤仍父子有大名屢書國史文康後十三世至公高祖倬久長國學成就弟子甚多盖自太師以來殊勳大科奕世貴顯者十有八公世數三韓名族必擧尹氏爲右曾祖先智忠淸兵馬節度使祖諱暾考諱昌世皆不仕後以公貴贈大父左承旨父吏曹參判母曰貞夫人淸州慶氏副提學渾之女隆慶辛未生公弱不好弄嶷嶷有度及長委禽於牛溪成先生之門飭勵不懈先生重之癸巳父憂廬墓二十七擢文科選補承文院權知副正字久之兼居山道察訪本職如故輔成均館典籍遷司憲府監察改刑曹佐郞又改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擧劾不避親故病辭還典籍歷兵禮刑三曹佐郞壬寅左遷水原判官明年罷歸無何敍還禮曹陞正郞兼記注官時統營須强佐銓曺擧公爲從事陽言遴柬而實遠之也無何拜北靑判官居二年所凡利害無不興廢者戊申解歸明年又出爲靈光郡守郡太劇難剸公至期年積案如洗率邑子弟興于學行養老禮親奉母兄上下同樂人大悅喜及去郡人追思碑之歷成均館直講奉常僉正軍資監正丙辰公之長子連繫誣告獄坐罷公見時事大變退歸鄕曲不跡於朝癸亥今 上卽位起拜司憲府掌令時有廢世子按律之議公持不可自免去遂得朔寧郡守適有公格不赴拜軍器寺僉正司宰監正無何還掌令陞執義錄入玉堂爲修撰校理副應敎移司諫又還應敎明年正月李适叛 上幸公州檢察使辟公從事先行至公州仍留行在御營使李貴注視江防望賊旗先遁軍遂大潰貴方負功自擅 上亦倚重言路厪厪請罷其副將公上箚力爭貴軍法人人無不竦然聳聽然公之後來枳仕塗實由此始焉賊平扈駕還都移議政府檢詳爲舍人司諫者俱再秋丁母憂丙寅服闋拜司成復移司諫又移輔德冑筵狃習漸懈公每當進講勸戒切至 世子甚敬憚是後遷改不出經幄宮僚之任補益弘多丁卯西虜大入邊廟堂請棄都城以避之公爲司諫極言其非計請斬倡義去頒者命 世子分朝策應議不行寇深 上幸江都公從行大臣勳貴多側目視公者而公論議益謝勵不少屈虜使劉海等來求盟 上召公卿臺諫議之李貴崔鳴吉皆言不可不從公極言和不可恃引宋注黃事以折之 上意與鳴吉合竟用其言公退與同僚抗論請鳴吉禦魅降將弘立蘭英等導虜反噬斷頭號令皆不省公慷慨不己復上疏曰今日之事名爲和而其實降也終有必亡之道等亡無寧決戰請亟斬主和誤國之臣逗撓奔潰之將又斬虜使而回賂胡之物犒賞三軍激勵人心 上怒下敎尹某疏中降字兇慘問啓公正言直對 上愈怒命奪職編配政院封還內旨三司交爭 上亦悟命仍其職公再辭乞遞會臺諫之簿時事者美公而惡勳柄其人前旣御未發因此欲兩中之危言激怒 上亦內不善以其名臣置之公謝病歸鄕里無何復拜舍人適有不獲己者僶俛還朝李仁居誅 上見其檄文入毁言疑公諫疏爲崇亟下嚴旨公移病自免久之以御史暗行西關窮邊險要無不遍歷悉陳撫民固圉之道還拜司諫用薦者除吉州牧使銓曺請例加不許命移安邊言路爭之留備補拾拜司成太僕正屢改應敎舍人輔德執義論宮禁不嚴 上命褫職辱復邇列擢同副承旨序陞右副明年拜吏曹參議乞暇上塚還爲大司成移兵曹參議明年力求補外得全州府尹首以寬民力爲務罷不急之役量田使者意在增賦公不從田與賦相左者一正之州人刻石頌德公素患目眚自南歸決意休退再以諫職召皆不赴丙子遭 王妃喪力疾就列 上哀傷踰節久不視朝公以爲國事岌岌宜日接臣鄰講求治道一日引對公又申前疏土簋短褐等語承旨李敬輿亦勸 上振作異以感動左右有以誹諧戲侮者公卽擧劾 上以災異命停月膳藩臣上疏請復勳戚大師營私蠹公公亦劾之由是不悅者滋多謗口諠譁公累章乞遞至十二月義州告焉書至不三日虜騎已到西郊 上倉黃欲幸江都不及入南漢山城公病執聞之與一子馳赴大臣以下錯愕失措公言于體府請先輸近城倉粟發輕騎急運武庫兵器不能用先是虜使持至僣號書 上與廟堂定議斥之是虜欲得當時主是議者以試我於是用事之人乘時圖逞喜得圈套平日淸論之攻己者睚眦已上欲盡置其中網絡張設無遺力乃陰力嗾諸營使兵士露刃宮門以脅之又矯內旨迫令自首頗有濫及公上疏待命又往體府奮言以身自當口號韻語與同舍相訣親故聞者多來哭別寄書諸子處後事夷然若他日會臺諫叩閤請中覈 上可之遂以尹集吳達濟二人爲應公及諸人得脫虎口矣迨 上自虜營還都倖相悍弁仇視士類計將魚肉之覰 上意不果尋命大臣加罪同譴者十人公爲首目以語涉不詳始命遠竄言路力救止配中道公旣至配所不與外人交深居杜門仰屋長嘆而己之冬 下敎放釋然非德音也公不敢歸家越境俟命明年秋始還尼山丙舍爲終焉計或勸稍近京輩且令諸子赴公車以避疑謗公曰七十之年兩目不見復何所覬謂諸子無以我故易志死生禍福命也終不動及聞朝廷有助兵之擧自此絶不問時事牢臥一室足不出戶庭五月感疾却藥不御遺命就先兆薄葬歛用士服勿飾墓四禮一遵平日訓書至六月四日易簀于正寢春秋六十九病時諄諄若啽囈旁人諦聽皆古人歎世傷時之語其惓惓憂國之意至死尤篤忠義之性出於天者盖如此子舜擧等祗命是年八月十九日窆于尼山縣北先墓後辛向之原公爲人莊重簡黙終日不設惰容及至接人溫然謙卑長者少孤事母甚謹共養腆備推以待昆弟姊妹加於人數等長子以公道授官公舍子擧弟以悅親意於宗族故人之貧窮者曲加撫卹所居州郡節省致足斥其餘以代民役而終不視德米穀魚鹽簿書井井吏不得容其奸以至館宇橋梁饔餼之具賓旅所待以周者咸無癈公雅不喜赫赫聲而考績常爲一道冣言未嘗極人過失至論義理之辨先定於內奮不願身雖人主之威亦不能奪當急遽造次之際精魄益壯發謀出慮高於平日慷慨揮涕觀者竦動爲文根柢道理遇事論列辭直理明一時號以文詞稱者有不如也平生所爲章奏切於君德時要者甚多顧余不能盡載然見其槩亦足以知公也嗚呼賈長沙陸忠州俱不究所蘊自古而然於公獨何憾焉必有任其責者矣公有六男二女長勛擧縣監次舜擧敎官以公命出後伯父商擧奉事文擧校理宣擧進士女壻李正輿權儁俱中司馬側室三男一女民擧進士耕擧生員次時擧女爲判官崔魯詹妾縣監子曰抃攇敎官子曰晢搢奉事子曰播校理子曰搏掄進士子曰拯推子姓兄弟文學行誼多有過人者人知公之後必將大顯以蕃而成公未伸之志也銘曰
我 宣祖之後二十餘年當中國崇禎之世有賢大夫太師之裔身姓尹時之不淑履否運發憤忘身盡忠謇衆圓獨方擯以殞魯城之丘從父藏長夜冥自耿光江河不癈名與長
子舜擧敬書
成夫人嘉靖壬申四月九日生十九歸于公夫人生長禮法之家性又莊淑事姑慶夫人盡其孝慶夫人甚安之公晩甚通顯慶夫人固在食其祿夫人專務承順親表貴賤其至如歸而酒食唯命未嘗言有無公爲承旨及府尹夫人一皆視秩啓封諸子又連倫而進夫人愈自謙約紡績紝紃未嘗去手公兄弟五人姊妹二人姪甚衆異姓咸萃其細庶不同而夫人均有恩禮七門之聚無有怨議不滿者公歿逾月長子繼逝夫人重憂致哀十年如一日崇禎戊子出後子舜擧官安陰其九月二十九日夫人卒于縣舍將葬啓公墓有泉漳之患遂奉柩十二月三日合葬于尼山縣西長久洞去先府君葬三里而近長子勛擧墓在其前竊惟人家興運將至則必有賢婦人輔佐君子敎戒子孫以成模典旣而鄕黨承其化世道有所賴玆豈但家運之所關哉朝廷以諸子御訓趾美爲搢紳楷範今 上初陞文擧爲大憲宣擧爲司業足爲一時之光其孫曾皆有文行玆盖公之所貽以亦豈夫人之敎使然也淸陰文正公旣書公事于墓碑故略㝡夫人行蹟追篆其下方實立此碑者仲子商擧時守白川郡云
崇禎庚子四月 日
崇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成均館祭酒宋時烈記
子文擧敬書
昔在己卯冬舜擧等請撰先考誌于淸陰金文正公庚辰燔石而埋之墓前石底辛卯春復請碑文于公公曰余於前日朝夕視晷故已爲備述於玄石今
余病矣不任屬草且余於外家事亦以一篇兩用於幽顯爾其識之未幾公下世乃今治石而仍用此文者寔遵公敎也先考官止通政以南漢扈從賞加嘉善資而下批及壙後時有礙故墓誌與表皆無得以書之諸議以爲準格立碑則二品官階不容不書故始加諸行職之上焉先妣事實未及登載於原文玆又請宋尤庵爲後記凡此顚末不可不傳而子姓孫曾亦有未載者謹復具列于石之兩旁云勛擧娶觀察使崔沂女一男抃正言再娶經歷李長亨女一男攇生員二女壻李相夔朴尙絧妾女壻李稃舜擧郡守娶觀察使李春元女二男晢檢閱搢生員商擧娶察訪李敬培女一男播三女壻金碩昌李慶萬生員崔載翁再娶安瑱女一男抒一女幼文擧娶李瑑女二男搏掄五女壻李舜岳崔世慶李顒生員沈楷末未行成擧年十七未娶而殤宣擧娶生員李長白女二男拯推一女壻朴世垕妾男撥拙李正輿早卒有繼子敏迪校理權儁郡守三男恕志愍五女壻朴銑生員成一童餘未行民擧娶縣令洪稙女三男拱挺撜四女壻崔全斗女幼耕擧娶參判申鑑女二男㨷㨂四女幼時擧進士娶判書閔聖徽女未育再娶縣令李榮義女三男掆揵扌衷三女壻金壽稱餘幼崔魯詹一女壻李久松生員抃三男三女敬敎誠敎俱進士明敎壻李寬餘幼攇一男正敎二女晢三男一女道敎德敎知敎壻權在衡搢一女搏一男殷敎二女掄一女拯二女推二男自敎可敎敬敎一男一女誠敎二女皆幼
내용 중에 재방변(扌)의 한자 중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글들이 있어 부득이 한자를 둘로 나누어 표기하였으니 참고 바랍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일일이 읽어가면서 소개를 해왔는데 이번에는 논산문화원의 금석문대관을 참조하여 인용하니 너무 편합니다.
논산문화원의 노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이 글을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논산문화원 금석문대관'을 출처로 밝혀 주셔야 한답니다.
뭐 한문으로만 적혀 있으니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죠?
물론 계룡도령 춘월도 다 읽고 해석하지는 못합니다.
^^
그래서 한글로 쓴 묘비명을 올려드립니다.
윤 황 묘비
논산문화원 발행 금석문대관
(전 액)
대사간 윤공 묘비명
(비 문)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 윤공 묘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 찬.
가선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 겸동지성균관사 김수항 전.
고 대사간 팔송 윤공은 파평인이다. 자질이 강하고 굳세어 큰 절개가 있고,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힘쓰고 독실하게 행하며, 항상 세상을 다스리는 뜻을 품고 수차례 상소를 올려 일을 의논함은 모두 국가의 안위와 존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끝내 합치하는 바가 없이 일생을 마쳤다.
내가 일찍이 논하건대.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는, 세상에 쓸 뜻을 가지고 내지만, 그에 합당한 자가 드물고 부적합한 자가 많다. 혹 처음에는 나갔으나 마침내는 물리침을 당하고 혹 겉으로는 기뻐하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꺼려 하여, 생전에는 당시에 보탬이 되지 않았어도, 죽어서는 후세에 이름이 나는 이가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불초한 무리들이 간악한 생각을 품고 나라를 그르치면서 높은 자리에 앉아 후한 녹봉을 받으며 서로 어깨를 부비며 한 무리가 되어, 어진 자와 충성스러운 자를 항상 멀리하고 친하려 하지 않고, 그들 보기를 원수같이 하니, 오호라! 어찌 하늘의 뜻이 다함인가. 숭정 9년 2월에 공이 재화를 입어 상소를 올렸는데 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하늘의 노여움이 극에 달해, 온 나라 사람들이 황황 급급한데,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이 계셔서 군신들이 감히 만나 보지 못하니 상하가 답답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부터 어찌 이러한 일이 있고서,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잘못된 정치를 이어받은 자가 떳떳한 도리를 지킬 수 없고, 작은 절개에 구애받는 자는 능히 대업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만일 크게 깨달아 행하고 넓고 과감하게 행동하여 구습의 습관을 혁신하지 않으면 난리로 망하는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이 전날에 종묘지락을 정지해 줄 것을 청한 것은 종묘지락의 철회가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반드시 묘악을 말한 것은, 묘악이 철회되면 어선은 반드시 단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요, 어복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요, 내탕과 내수를 얻거나 지출하지 아니하며, 환관과 궁첩을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진상을 가히 파 할 수 있고, 공헌을 가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니 이것들을 이루어 간다면 백가지 불필요한 경비를 덜 수 있어 위태함이 안전하게 전환되는 것이 여기에 있으니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오늘날 생존의 방책을 도모하는 데는 다만 백성을 보존하는 것과 양병에 있는데 제향과 왕을 모시는 일이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외부에서 공납하는 것은 폐하고, 저자에서 사서 쓰고 있으니 만일 태관의 관요와 음식, 상방의 직조와 공작을 모두 멈추고 파해서 흙으로 만든 제기와 나물국과 짧은 갈포옷의 크고 훌륭한 덕을 본받고 궁녀와 판방에서 옛 제도를 회복해서 써서 면포를 걷어 들이고 땔나무를 공급받는 비용을 줄이며 그 밖에도 모두 절약해서 검소하게 하고 생략할 수 있는 것을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안으로는 훈척들이 점유한 공전과 산과 못의 이용과 여러 관청의 크고 작은 사사로운 급여의 남용을 탁지부에 맡겨 일괄하고, 밖으로는 각 군영과 각 군에서 횡포로 거둬들이고 낭비하며, 뇌물을 받치는 것들을 차례로 개혁하게 되면 재물의 사용하는 제도도 생기고 백성도 살아날 것입니다.” 하였다. “신이 살펴보니 팔도에서 개간한 밭이 50여만 결인데 탁지부에서 해마다 부과하는 쌀은 14만 석에 불과한데 항상 비용이 거의 3분의 2가 드니 그 나머지로 항상 바치게 하면 반드시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금 외에 모든 부역을 없앤 후에 한 결의 밭 세금으로 5두미와 한필의 면포를 부과해서 양병의 자금으로 사용한다면 식량의 부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 군사 제도에 있어 수를 줄여 정예를 뽑고 그 장수와 영관을 택하여 그의 의식주를 넉넉하게 해 주고, 기예를 익히게 하고, 상벌을 밝히면 정예 군사 10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군사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삼월에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추한 오랑캐가 방자하여 악하고 거슬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가혹하나, 이미 갚지 못하고 돌아와서 만일 말을 달콤하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를 우롱함에 반드시 솔개가 날 듯하고 돌이 부딪치듯 하여, 우리를 두렵게 하기를 군사로 할 것입니다. 이때가 이르기 전에 힘을 기르고 스스로 강하게 하면,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그 벌어지는 소란을 들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런즉 오늘날 의리에 항거하는 것은 마침내 빈말이 되고 실로 화에 돌아갈 것입니다. 오늘날, 급한 일은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여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신이 전에 상소하여 말씀드린 것이 이것입니다. 원하오니, 전하께서는 급히 안타깝고 가슴 아픈 마음으로 하교를 내려서, 팔방에서 전하의 원대한 뜻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고 똑똑하게 알게 한 후에, 친히 전방에 나와 국방의 튼튼함을 검토하시고 경계를 펴게 하셔서, 다시는 안일하고, 일시적인 편안함을 꾀하는 일에 흔들리고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팔월에 차자를 다시 올려 말하기를 “신이 전일에 말씀드린 것은 흐리면 비 오는 것을 예비해야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지금 화의 기틀이 이미 임박하여, 마치 눈썹에 불이 붙는 급박함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전하께서는 먼저 각 궁에서 일하는 하인과 측근에서 익힌 젊은이를 징발하고, 다음으로 궁실이나 백관의 준재들을 징발하고, 다음으로 유생들을 징발하고, 다음으로 각 관아에 서 일하는 구실아치를 징발하고, 다음으로 백성을 징발하고, 다음으로 공사간 천민을 징발하면 서울 안에 수만인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방에서도 군사를 선발하는데 이 방법을 사용하여 먼저 호족과 세도가에서 징발하고 뒤에 낮은 사람에게 이르면 누가 감히 원망하며 누가 감히 법을 피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수십만의 정병을 수고롭지 않게 얻을 수 있습니다. 비변사를 해체하여 먼 지방에 나가는 제도의 피해를 줄이고, 강화도의 방비를 철거하고, 행궁을 불살라 버리고, 평양으로 진주하여 반드시 싸우면 물러가거나, 패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충의로운 지사와 남은 양식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군사를 다시 징집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모집되고, 식량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모아져서, 군사의 위용이 왕성하고 웅장하게 풍채가 변모할 것이니, 누구와 오랜 동안 약속하기를 꺼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들이나 공이 홀로 다 말씀하여 숨기지 아니하고, 시종 충성스러운 정성이 간을 떨어뜨리고 담을 녹일 뿐이요, 듣기를 싫어하고 마침내 실행됨을 보지 못하더니 그 해 겨울에 오랑캐가 국력을 기울여 쳐들어오니, 국가의 욕됨과 백성의 삶에 화가 미쳤을 뿐이다. 이 모두 공의 말과 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뉘우치고 깨닫지 못하며, 공에게 먼저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해서 큰 화가 되었다고 하니, 오호라! 이는 인간의 일이요 천운이 아니었다.
공의 이름은 황이요 자는 덕요이요 팔송은 그의 호이다. 고려태사 신달의 후예이다. 5세인 문숙공 관은 문강공 언이를 낳았는데 부자가 나라에 큰 이름을 얻어 여러 번 국사에 기록되었다. 문강공 후 13세인 공의 고조 탁에 이르러 오래도록 국학의 어른으로 제자들을 길러내니 그 수가 심히 많았다. 대개 태사 이래로 뛰어난 공훈과 대과의 급제와 세상을 빛내는 현달한 분이 18분이다. 공의 세대에 삼한의 명족을 손꼽을 때 반드시 윤씨를 들어 제일로 하였다. 증조 선지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이요, 할아버지는 돈이요, 아버지는 창세이니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뒤에 공이 귀하게 되어, 할아버지는 좌승지로, 아버지는 이조참판으로 증직하였다. 어머니는 정부인 청주 경씨이니 부제학 흔의 따님이다. 융경 신미년에 공을 낳았는데 약하면서 희롱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의젓하여 법도가 있었다. 차차 자라서 우계 성 선생의 가문으로 장가들어 도리를 닦고 공부에 힘써 게으르지 않으니 선생이 중히 여겼다. 계사년에 아버지 상사를 당하여 시묘를 살았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어 보직하고 부정자를 잠시 맡았다가, 오래지 않아 거산도 찰방을 겸하면서 본직은 그대로 하였다. 성균관 전적으로 옮기고 사헌부 감찰로 전직하고, 다시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옮겨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탄핵을 당하여도 피하지 아니하고 어버이의 병환으로 사양하였다가 전적의 직책을 받고 돌아와서 병조, 예조, 형조의 삼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임인년에 수원 판관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에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예조에 돌아가 정랑으로 승진하고 기주관을 겸하였다. 당시 통영에서 강직한 보좌관이 필요했는데 전조에서 공을 천거하여 종사관이 되었는데, 실은 선발됐다기보다 그를 멀리하고자 한 것이다. 얼마 후에 북청 판관이 되어, 2년을 지내면서 이롭고 해로운 바를 일으키고 폐하지 않음이 없었다. 무신년에 해직되어 돌아오고, 이듬해에 다시 나아가 영광 군수로 나갔는데, 군내가 너무 어려운 일로 가득 차,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을, 공이 부임하여 일년 안에, 그동안 쌓였던 안건을 말끔히 해결하였다. 온 고을 젊은이들이 배움에 힘쓰고, 노인을 봉양하고, 부모에게 예를 다 하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잘 받드니, 상하가 다 즐거워하고, 사람들이 다 크게 기뻐하였다. 급기야 떠나게 되니, 군민이 일어나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성균관 직강, 봉상시 첨정, 군자감정을 역임하고 병진년에 공의 장자가 무고죄로 연계되어 옥에 갇히고, 공이 해직되었다. 공이 사회가 크게 변하는 것을 보고,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서 조정에 나가지 아니 하였다. 계해년에 금상이 즉위하자 사헌부 장령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폐세자에 관한 율례를 조사하려는 의논이 있을 때, 공이 불가함을 지지하고, 스스로 직을 떠났으나 곧 삭령 군수을 얻었다. 그러니 공직의 격식에 맞지 않아 부임하지 않았다. 군기시첨정과 사재감정을 배수하고, 얼마 후 장령으로 돌아와서 집의에 오르고 옥당에 입록 되어서 수찬, 교리, 부응교가 되고, 사간원으로 옮기고 또 응교로 돌아왔다. 이듬해 정월에 이괄이 반역을 일으키니, 임금이 공주로 내려올 때, 공을 검찰사로 명하여 먼저 떠나 종사하게 하니, 공주에 이르러 행재소에 머물렀다. 어영사 이귀가 강가 방비를 가보고 적진의 깃발을 바라보고는 먼저 도망하니 군이 크게 무너졌다. 그런데도 귀는 바로 공로를 핑계대고 제 마음대로 처신하였으며 왕 또한 그를 귀중히 여겨, 왕께 아뢸 길이 막혔다. 그 부장을 파면할 것을 청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귀를 군법에 회부시킬 것을 힘써 간하니 사람마다 두려워하며 듣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공이 벼슬길이 막힌 것은 실로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적이 평정되고 어가를 호위하여 환도하니, 의정부 검상으로 이임하고, 사인과 사간이 된 것이 모두 두 번이나 되었다. 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여 병인년에 복을 마치니, 사성을 배수하고 다시 사간으로 옮기고 또 보덕과 주연으로 옮겼는데, 관습이 점점 해이해져서, 공이 매번 강론을 드릴 때 권면하고 경계함이 간단하면서도 극진하여, 세자가 심히 경탄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옮기고 고침이 경연관과 동궁 관료들의 보임에 벗어나지 아니하여 돕고 보탬이 크게 많아졌다. 정묘년에 서쪽 오랑캐가 대군으로 변방을 침입하니, 조정에서는 도성을 버리고 피할 것을 청하나, 공이 사간이 되어서, 그것이 잘못된 계교임을 극진히 말하여, 거빈을 주장한 자를 참수할 것을 청하였다. 세자를 명하여 조정을 둘로 나룰 계책이 있었으나 실행치 못하고, 도적이 깊이 들어오니, 임금이 강화로 행차하였다. 공이 따라갈 때, 대신들과 훈구 귀인들이 많이 곁눈으로 공을 바라보았으나, 공은 개의치 않고 더욱 격렬한 논의를 하였다. 오랑캐가 사신 유해 등을 시켜 동맹하기를 구하니, 왕이 공경과 대간을 불러 의논하니, 이귀, 최명길이 모두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공은 극진히 화친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송주황의 고사를 들어 그것을 꺾으니, 왕이 최명길과 더불어 합의하여, 마침내 그의 말을 쓰게 되었다. 공이 물러 나와 동료와 더불어 항변해 논하여 청하기를 최명길은 도적을 막다가 항복하고, 홍립과 난영은 오랑캐를 인도하여 반서케 하니, 이들에게 참수하라는 호령을 내리소서 하니, 모두 살피지 아니하였다. 공이 의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상소해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명목상으로는 화친이나 실제는 항복입니다. 마침내 망하는 도리가 반드시 있으니, 결전을 없이 어찌 망하겠습니까. 청컨대, 서둘러,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 일을 그르친 대신과 머뭇거리다 도망간 장수를 참수하고, 오랑캐의 사신을 참수하고, 오랑캐에게 줄 물품을 돌려서 삼군에 호상하시어 인심을 격려하소서.’ 하니, 왕이 노하여 하교하기를 ‘윤모의 상소문 중에 항복이라는 말은 흉하고 참담하다.’하고 문계하자, 공이 바른 말로 직언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관직을 삭탈할 것을 명하고 귀양 보내라 하였다. 정원에서는 봉한 교지를 돌려보내며 삼사에서 교대로 간하니, 왕이 깨닫고 그 직책을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공이 두 번 사양하고 체직할 것을 빌으니, 대간에서 시사를 모으는 자가 공을 아름답게 여기고 공훈으로 얻은 권세자를 미워하더니, 그 사람이 전에는 주장하지 못했다가 양방에 맞는 위험한 말을 격앙하게 말하니, 왕은 속으로는 언짢으나, 그가 명신이므로 논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병으로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에 다시 사인을 배수하였다. 이미 얻지 못한 것이 있어 억지로 조정에 돌아오니, 이인거가 이미 베임을 당하였다. 왕이 그 격문을 보고 입조하여 공을 헐뜯어 말하면서 공이 올린 상소가 원인이 되었다고 의심하여 급히 엄한 지시를 내리니, 공이 병으로 스스로 그 직을 그만두었다. 오랜 후에 어사가 되어 관서로 암행 할 때, 궁벽진 오지와 험준한 길을 두루 다니면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변방을 편안히 하는 도리를 진술하였다. 돌아와서 사간을 배수하고, 추천하는 이가 있어서 길주 목사를 제수하였는데, 전조에서 관례에 따라 명을 허락지 않을 것을 청하여, 안변으로 옮기니 언로에서 보습하기를 대비하다가 사복과 태복정을 배수하고 여러번 응교, 사인, 보덕, 집의 등을 맡았다. 궁궐의 법도가 엄하지 않은 것을 논하니, 왕이 명하여 직책을 바꾸게 하고 다시 반열을 찾아서 동부승지에 박탈하고 차례로 우부승지에 승진하였다. 명년에 이조참의를 배수하고 휴가를 얻어 묘에 참배하고 돌아와 대사성이 되고, 병조참의로 옮겼다. 명년에 외직에 나갈 것을 힘써 구하여 전주부윤을 얻었다. 가서 제일 먼저 세금을 덜어 백성의 살림을 너그럽게 하고, 급하지 않은 부역은 면해주고 양전을 짓는 사람에게 더 부과하려는 것을 공은 따르지 않고 밭과 세금의 균형을 바로잡으니, 고을 사람들이 돌에 새겨 덕을 칭송하였다. 공이 평소에 눈병을 앓았는데 남쪽에서 돌아와 휴직하고 퇴직을 결심하였는데, 다시 간관으로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왕비상을 당하여 힘써 빨리 달려가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왕의 애도함이 정도를 넘어서 오래도록 조회를 보지 못하니, 공이 아뢰기를 ‘국사가 위태로우니 마땅히 날마다 신하를 만나 치도를 강구하소서.’하니, 하루는 신하를 대면할 때 공이 전에 올린 상소를 또 올려 토기제기와 짧은 옷을 거듭 아뢰니, 승지 이경여 역시 아뢰어 왕이 떨쳐 일어나기를 바랐는데 좌우에서 비방하고 업신여기는 자가 있어 공이 곧 탄핵하였다. 왕이 재앙의 변이가 있어 좋은 음식을 정지케 하였다. 외직 관찰사가 상소하여 훈척대사들이 사사로운 것을 경영하고, 나라 것을 좀먹는 것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공도 역시 이것을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공을 기뻐하지 않은 지 가 많아지고 비방의 소식도 들려서 여러번 상소하여 전직을 애걸하였다. 12월에 의주에서 급보가 이르렀는데 삼일이 못되어 오랑캐가 이미 서쪽 교외에 이르렀다. 왕이 창황하여 강화도로 행차코자 하였으나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미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 병중인데도 아들과 더불어 달려가 보니, 대신들이 당황하여 조치를 못하고 있었다. 공이 체부에 청하여 먼저 가까운 성의 창고 곡식을 옮기고, 가벼운 기마를 내어 급히 무기를 운반하라 하였으나, 능히 쓰이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오랑캐 사신이 참람되게 이름을 지은 서신을 가져오니, 왕이 조정에 나와 의논하여 이를 물리쳤는데, 이는 오랑캐가 당시에 이 의논을 주장한 자를 찾고자 우리를 시험한 것이다. 이에 권세가가 때를 타서 기뻐할 일을 바치기로 하고 모함하여 평소에 청론으로 자기를 공격한 자가 윗사람에게 눈을 치켜뜨고 기진하여 음으로 여러 군영 장수들에게 지껄이니, 병졸들이 궁궐문에서 칼을 들고 시위하고, 왕의 지령을 밝히려고 수령들에게 자수하게 하니, 그 참람함이 이에 미쳤다. 공이 상소하고 하명을 기다리며 감영에 가서 말로 떨치고 몸으로 스스로 감당하며 입으로는 시운을 읊으며 동료들과 더불어 서로 작별하니, 친척과 친구들이 듣고 많이 몰려와 울면서 작별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후의 일을 조치하고 태연함이 평일과 같았다. 사헌부, 사간원에 모이면 임금에게 고하기를 거듭하니, 왕이 옳게 여겨, 드디어 윤 집, 오달제 등 2인이 대응하여 공과 여러 사람이 사지에서 벗어났다. 왕이 오랑캐의 병영에서 환도하자 요행한 재상과 사나운 무관들이 선비들을 원수같이 보고, 장차 짓밟아버릴 것을 꾀하니 왕이 과감히 처단치 못하고 대신에게 명하여 죄를 주니, 귀양간 사람이 10인인데 공이 우두머리였다. 공의 말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처음에는 멀리 귀양을 명했으나 언로에서 힘써 구원하여 중도에서 유배하는 것이 멈췄다. 공이 유배소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깊이 묻히어 문을 닫고 천정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 할 뿐이었다. 겨울이 되어 석방하도록 하교하였으나 덕음이 아니었다. 공은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지경을 넘어서 기다리다가 명년 가을에서야 노성 병사리 집으로 돌아와서 거기서 종신할 계획이었다. 어떤 이는 서울로 피하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칠십의 나이에 두 눈이 보이지 않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리오.’하고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 때문에 뜻한 바를 바꾸지 말라. 죽고 사는 것과 화와 복은 운명이다.’하고 마침내 이동하지 아니하였다. 조정에서 병사의 거사를 돕는 일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를 거절하고 서사를 묻지 않고, 방안에 곧게 누워, 발걸음을 집 뜰에도 내딛지 아니 하였다. 5월에 감기에 걸렸으나 약을 물리치고 먹지 않으며, 유언으로 선영에 묻기를 말하고, 장 사 절차는 간소하게 하고, 염습할 때 선비 의복으로 하고, 무덤은 꾸미지 말고, 4례는 평소 가르친 대로 따르라고 하였다. 6월 4일 집 안방에서 돌아가니 향년 69세이었다. 병중에 조용하고 온순하게 잠꼬대처럼 말하는데 옆의 사람이 들어보니, 모두가 옛사람이 세상을 탄식하고, 시국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그 삼가고 삼가며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더욱 도타우니, 충의로운 성품이 하늘에서 나온 것 같았다. 아들 순거 등이 그 해 8월 19일에 노성현 북쪽 선영 산소 뒤 신향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과묵하며, 종일토록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고, 사람을 대접할 때는 따스하고, 어른에게는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기를 심히 조심스럽게 하고 공양함에 후하게 하며, 형제자매를 남다르게 대하였다. 장자가 공의 공로로 벼슬길에 나가게 됐는데, 자식을 제치고 아우를 천거하여 어버이의 뜻을 기쁘게 하였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곤궁하면 긍휼히 여겨 도와주었다. 주와 군에서 근무했을 때에도 절약하고 아껴서 넉넉함을 이루고, 그 여력으로 백성들의 노역을 대신하면서 공덕을 보이지 아니하고, 쌀과 어염의 문서가 깨끗하고 정당하여, 아전들의 간악함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관사의 관리, 교량 안전, 생활 도구, 손님 접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밀하여 버릴 것이 없어, 공은 평소의 좋은 소문에 기뻐하지 아니하여도, 그 업적을 따져보면 도내에서 제일 으뜸이 되었다. 말함에 남의 과실은 과격하게 아니하고, 논변에서는 먼저 안으로 분발하고 몸에 구애하지 아니하여, 이를 임금의 위엄이라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급한 일을 당하여도 정신과 기백이 더욱 씩씩해지고, 지혜와 생각이 평소보다 뛰어나고, 강개하여 눈물흘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주었다. 문장은 도리에 근본을 두고, 일을 만나 의논을 할 때 논리가 정연하고, 말할 때 이치가 분명하여 한때 문장가로 불리었으나 같지 않음이 있었다. 평생에 임금에게 올린 글이 왕의 덕치와 시국의 요체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 심히 많았다. 돌아 보건데 내가 능히 여기에 다 싣지 못하나, 그러나 그 대개를 보면 족히 공을 알 수 있다. 오호라! 가장사와 육충주도 모두 익힐 일을 다 강구하지 못했다. 옛날도 그러했는데, 공에게 홀로 무엇이 유감스러우랴. 반드시 그 책임을 진 자가 있을 것이다. 공은 6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 운거는 현감이요, 차남 순거는 교관이나 공의 명으로 백부에게 양자가고, 상거는 봉사이요, 문교는 교리이고, 선거는 진사이며, 사위는 이정여, 권 준인데 모두 사마시에 급제하고, 측실에서 3남 1녀를 두니 민거는 진사이요, 경거는 생원이요, 다음은 시거이고 딸은 판관 최노첨의 측실이 되었다. 현감 운거는 아들은 변, 현이요, 교관 순거의 아들은 석, 진이요, 봉사 상거의 아들은 파요, 교리 문교의 아들은 박, 윤이요, 진사 선거의 아들은 증, 추이다. 자손, 형제가 문학과 바른 행위가 남보다 뛰어난 자가 많으니 남들이 공의 후예가 반드시 장차 크게 나타나서, 번성하고 잘 되어 공이 다 펴지 못한 뜻을 이룰 것을 알았다. 명하노니,
선조임금 이후 20여년은 중국 숭정의 세상을 당하여 현대부가 있었도다. 그는 태사의 후예로 성은 윤씨인데 때가 맑지 못해서 불운을 겪었도다. 몸을 돌아보지 않고, 충성스런 직언을 다하고, 뭇사람은 둥글게 사나, 공은 모가 져서 목숨을 다하는데 이르렀다. 노성의 언덕 선영에 장사하니, 긴긴밤 어두움을 홀로 밝게 빛내리라. 강과 하수가 마르지 않듯, 공의 이름은 영원하리라.
아들 순거 삼가 비문을 필사하다.
(추 기)
성부인은 가정 임신 4월 9일에 출생하여 공에게 시집오다. 부인은 예와 법도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성품이 씩씩하고 맑아서, 시어머니 경부인을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경부인이 심히 편안했다. 공이 만년에 벼슬이 높아졌음에도, 경부인은 굳이 녹으로 받은 곡식만 들고, 부인도 오로지 이를 이어 받았으며, 친척이나 귀한 손님과 천한 손님이 많이 찾아와서, 술이나 식사를 차리라고 하여도 일찍이 있고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공이 승지와 부윤이 되었을 때에도 부인은 하나같이 그 직책을 보아 할 일을 봉하였다. 또 이어서 여러 아들들이 승진하니 부인은 더욱 스스로를 겸손히 하고 검소하며, 길쌈과 바느질을 계속하였다. 공의 형제는 다섯이요 자매는 둘이요, 자질들이 심히 많아서 내외손을 모두 모으면, 크고 작은 것이 서로 다른데도, 부인은 모두 은혜와 예로 대하여, 일곱 집이 모두 모여도 원망하거나 불만스런 말이 없었다. 공이 돌아간 후 한 달 만에 장자가 이어서 돌아가니 부인은 거듭되는 상사를 만나 10여년을 하루같이 지냈다. 숭정 무자년에 양자 간 아들 순거가 안음 현감이 되었는데 9월 29일에 부인이 임지 관사에서 돌아가서, 장례를 모시려고 공의 묘를 열어보니 물이 차 있어 걱정이었다. 드디어 운구하여 12월 3일에 노성 서쪽 장구리에 공과 합장하니, 선부군 묘와는 3리가 떨어져 있고, 장자 운거의 묘는 가까이 앞에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집안이 흥하려면 반드시 어진 부인이 있어 남편을 보좌하고 자손을 가르치고 엄하게 해서 모범을 보이고, 이어 그 고을이 교화를 받고, 세상의 도리가 힘입은 바 되니, 이것이 어찌 가운데만 관계된다 하겠는가. 조정에 나간 여러 아들들이 왕의 훈계를 잘 받들고, 행실이 아름다워 모든 신하들의 모범이 되었다. 선조 초에 문거는 대사헌이 되었고, 선거는 국자감 교수로 승진하여 한때의 영광이 되었다. 그 손자, 증손이 모두 문장과 행실이 좋았으니, 이는 공에게서 나왔으나, 어찌 부인의 가르침과 돌봄이 아니겠는가. 청음 문정공께서 이미 공의 사적은 묘비에 기록했기에, 부인의 행적을 대략 모아서 비문 뒤에 추기로 세운다. 이 비를 세운 이는 실은 둘째 아들 상거가, 그 때 백천 군수이었다.
숭정 경자 4월 일.
아들 문거 삼가 쓰다.
(추 기)
지난 기묘년 겨울에 순거 등이 선고의 묘지명을 청음 김문정공에게 부탁하여 글을 짓고, 경진년에 석판을 구해 새겨, 묘전의 돌 밑에 묻고, 신묘년 봄에 다시 공에게 비문을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조석으로 해그림자를 보면서 이미 현석에 기술했는데, 이제 내가 병이 있어 부탁받은 비문 초안을 맡을 수가 없다.’하였다. ‘또한 내가 외가의 일에 한편으로는 생존 시와 돌아간 후에 두 번 쓰는 것이라.’하더니, 비문을 쓰고서 얼마 후에 공이 돌아갔다. 이제 돌을 다듬어 이 글을 그대로 쓰는 것은 공의 가르침을 따름이라. 선고의 벼슬은 통정에 그쳤으나 남한산성에서 호종한 것으로 해서, 포상으로 가선대부의 계직을 더하고, 비답을 내렸으나 묘소에 이르러서는 걸림이 있어, 모지와 묘표에 모두 이것을 쓸 수 없었다. 여럿이 의논하기를 품격에 맞춰 비를 세운다면 이품의 관직을 쓰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행직에 높은 것을 더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실은 원문에 등재하지 아니하고 또 우암에게 청하여 후기를 하였는데, 이 모든 전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자손과 증손도 미쳐 기록하지 않은 것이 있어, 삼가 다시 비의 양측에 갖추어 기록하였다. 운거는 관찰사 최 기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변을 두니 정언이고, 재취하니 경력인 이장형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헌을 두니 생원이요, 두 딸은 이상기와 박상경에게 출가하고, 첩의 딸은 이 부에게 출가하였다. 순거는 군수니 관찰사 이춘원의 따님을 취하여 두 아들을 두니, 검열인 석과 생원인 진을 두었다. 상거는 찰방 이경배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파와 세 딸을 두니, 사위는 김창석, 이경만은 생원이요, 최재웅이다. 재취는 안 진의 따님인데 아들 자와 딸 하는 어리다. 문거는 이 연의 따님을 취하여 박, 윤 두 아들을 두고, 다섯 따님을 두니 사위는 이순악, 최세경, 생원인 이 옹, 심해이고 막내는 미혼이다. 성거는 나이 17세에 장가들기 전에 죽었다. 선거는 생원 이장백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 증과 추를 두고, 딸 하나는 박세후에게 출가하였다. 첩의 아들은 발과 졸이요, 이정여는 일찍 죽고, 양자로 교리 민적이 있다. 권 준은 군수인데 3남 공, 정, 등을 두고, 네 딸을 두니 사위는 최전우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경거는 참판 신 감의 따님을 취하여 2남 근, 간을 두고, 네 딸을 두니 어리다. 시거는 진사인데 판서 민성휘의 따님을 취하나 자녀가 없고, 재취하니 현령 이영의의 따님을 얻어 3남 강, 건, 충을 두고, 삼녀를 두니 사위는 김수칭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최노첨은 1녀를 두니 사위는 이구송인데 생원이다. 변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경교, 성교는 모두 진사요, 명교이고, 사위는 이 관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헌은 아들 정교와 두 딸을 두었다. 석은 3남 1녀를 두니, 도교, 덕교, 지교이고 사위는 권재형이다. 진은 딸 하나를 두고, 파도 딸 하나요, 박은 아들 은교와 두 딸을 두고, 윤은 딸 하나를 두고, 증은 두 딸을 두고, 추는 두 아들 자교, 가교를 두고, 경교는 1남 1녀를 두고, 성교는 두 딸을 두니 모두 어리다.
문정공 팔송 윤황선생의 묘역에는 후손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요.
이런 모습을 한 동자석이 있는 곳이 문정공 팔송 윤황선생 묘역입니다.
문정공 팔화송 윤황선생의 묘입니다.
상석 뒤의 오랜 역사를 이고있는 비석에는
成夫煌平大 성부황평대
氏人之尹司 씨인지윤사
祔昌墓公諫 부창묘공간
左寧貞諱坡 좌녕정휘파
라고 적혀있는데요.
대사간 파평윤공 휘 황 지묘 정부인 창녕 성씨 부좌인데요.
윤황 선생과 정부인이 같이 묻혀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옆에는 오석으로 새롭게 만든 비석이 도 하나 더 세워져 있는데요.
大司諫 贈領議政諡文正尹公煌墓 대사간 증영의정시문정윤공황묘
貞夫人 贈貞敬夫人昌寧成氏祔左 정부인 증정경부인창녕성씨부좌
뜻을 보면
대사간 벼슬을 지냈으며 영의정을 추증받고 시호가 문정인 윤황의 묘이며 정부인으로 정경부인을 추증받은 창녕성씨가 곁에 함께 묻혀있다는 내용으로 원래의 비석문 보다 더 상세하게 새겨놓은 것입니다.
문성공 팔송 윤황 선생의 제례를 위해 지어진 재실이 보입니다.
원래의 모습인지는 몰라도 호박돌들이 이 지역에서 나는 것이 아닌 걸로 보아 증.개축을 꾸준히 해 온것으로 보입니다.
재미난 것은 돌벽을 올라가는 곳에 작은 돌을 놓아 두어 오르내리기 편하게 해 두었습니다.
^^
문정공 팔송 윤황(尹煌, 1572~1639)선생은 윤창세(尹昌世,1543~1593)선생의 아들로 동부승지와 이조참의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했으며,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 후 문정공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아들은 노서 윤선거선생이고, 손자는 숙종 대 소론의 거두였던 명재 윤증선생입니다.
윤황 선생 고택은 1985년 12월 31일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릅니다.
永思堂[영사당]
논산 문정공 팔송 윤황선생재실은 1665년(현종 6) 2월에 안채를 건축하여 상량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2월에 문간채와 서재, 동재를 건축하였답니다.
처음 어디에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윤황의 6세손인 윤정진(尹定鎭)이 영조 때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2021년 4월 6일 동재 보수 모습
400여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그 원형은 변형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논산윤황선생재실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의 구조와 미를 느끼게 해주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어 목조 건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으며 집의 구조는 중부 지방 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구리 마을에는 파평윤씨들의 유적과 묘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논산 윤황선생 재실의 입구입니다.
기호유학의 중심 논산에는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유적들이 많은데요.
논산 팔송윤황 선생 재실과 묘소 주변에는 논산윤황고택을 비롯해 노강서원, 한국유교문화진흥원, 종학당, 병사저수지와 파평윤씨 병사와 묘역, 그리고 노성향교, 명재고택, 노성궐리사 등 유교문화 유적들이 가득하답니다.
여행을 계획한다면 위 순서대로 둘러 본다면 오롯이 하루가 소요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소문난 맛집들이 많아 즐거운 식사를 하고 명재고택에서 한옥숙박체험도 가능하니 계획을 잘 세워 아이들이나 성인 모두가 만족하는 여행을 즐겨 보세요.^^
논산 10기 서포터즈 조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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