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기 김해시 SNS 서포터즈 박치곤

광석마을이라 불렸던 무계마을

'시원한 골목길' '벽화마을' - 장유 무계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알록달록 컬러풀한 그림으로 골목길의 어두움을 밝음으로 변화시켜주고 걷는 사람들의 발과 마주 닿는 길은 특수 재료 및 방법으로 포장되어 표면 온도를 낮추어 도시의 열성 현상 저감의 효과가 있어 보행자의 더위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길을 누비다보면 커다란 바위 하나와 맣딱드리게 됩니다.

역사가 있는 무계,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고인돌이 마을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예전에는 광석마을로 불렸습니다.

광석마을은 이름 그대로 바위가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지석묘라고 불리는 고인돌, 광석마을(무계마을)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광석방구'라고 불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돌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광석 위에 올라 드러눕기도 하는 등 이곳에서의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계마을 고인돌(지석묘)는 1996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1962년 농부에 의해 냇돌로 벽을 쌓고 3매의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돌덧널이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아쉽게도 덮개돌은 없어졌습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중 붉은 간토기는 파편뿐이었지만 남한 고인돌에서 흔히 나오는 둥근바닥의 단지라고 합니다.

무계마을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전형적인 남방식(바둑판식)으로서 구조상 특이한 점은 없으나, 석검과 3점의 청동촉이 나왔다는 점에서 고인돌 연구의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있습니다.


남방불교 전래의 시작 - 장유사

일찍 찾아온 무더위를 잠시 식혀가기 위해 대청계곡과 장유폭포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산 머리로 향해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불상과 함께 만나는 곳이 바로 장유사입니다.

장유사에는 사천왕문, 청동지장보살대불,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 장유화상 사리탑이 있습니다. 장유화상 사리탑 외에 대부분의 전각들은 한국전쟁으로 유실되었으나 1980년대 화엄스님이 중창불사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합니다.

대웅전의 지붕, 두마리의 용이 장유사 대웅전의 머리에 올라앉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비상을 준비하는 듯 합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진득한 무게감까지 더해지는 장유사 대웅전의 용마루의 쌍용은 장유사에 들리면 꼭 들여다보는 곳입니다.

몇 년 전에는 난간에 둘러싸여있었던 장유화상 사리탑은 지금은 개방되어 쉽게 탑을 둘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난간을 해체한 이유는 일제시대인 1915년과 1935년에 장유사와 사리탑을 복원하면서 석축의 형태와 난간이 일제시대의 형태를 갖고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유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남방 불교전래설을 입증하고 있는 사찰로 AD48년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인 장유화상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후가 된 허황옥과 함께 이곳으로 와서 최초로 창건했다는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방 불교는 중국을 통해 북쪽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남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 전파된 불교입니다. 설화에서 장유화상은 허황옥의 오빠로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넘어와 불교를 최초로 전래한 사람이라 전해집니다. 하지만 가야사 초반 내용이 담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장유

화상의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장유 율하 유적공원과 전시실

하늘을 향해 누가 더 키가 큰지 내기라도 하는 듯 길게 뻗어 있는 아파트 단지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적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곳, 김해율하유적전시관과 율하유적공원입니다.

이곳은 [김해 율하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시행하기 전에 2001년 실시된 지표조사 및 2004년 실시한 시굴조사 결과 중요 유적의 기록 및 고고학적 연구의 기초자료 활용과 문화유적 보존의 방안으로 율하 문화유적공원을 조성하고 유적전시관을 조성했습니다.

박석 없는 기단식 고인돌의 형태를 보이는 장유 율하 유적공원의 고인

장유 율하유적공원의 고인돌은 70여 기의 청동기 시대 무덤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무덤들은 당시의 지형을 이용하면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20여 기의 무덤으로 구성된 그룹은 가장 규모가 큽니다. 대부분 방형 또는 원형의 묘역 시설을 갖춘 큰 무덤들이 대체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외 북쪽은 고인돌은 규모가 작긴하지만 구조가 복잡한 형태에서 부터 시작해 서북쪽으로 두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10여기의 무덤은 규모도 작고 배치가 균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규모와 배열 특징을 살펴볼때 어느 정도의 계급화가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야외에 있는 무덤들의 유적들을 살펴보았다면 실내 전시실로 꾸며져있는 유적전시실로 발걸음을 향해봅니다.

입구에는 원형이 아니라 복제품이긴 하지만 가야와 관련된 토우들의 형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김해 율하지구 택지조성사업에 따라 한국토지공사의 의뢰를 받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발굴 조사한 유적을 율하유적이라 합니다.

청동기 시대의 마을과 무덤이 그 중심에 있지만 가야시대의 무덤을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건물과 무덤 등이 포함되어 있는 유물 역사의 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 이곳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집과 무덤을 다른 장소에 만들었습니다. 뒤에 비탈을 의지한 얕은 구릉에 마을을 조성하고, 그들의 무덤은 마을 앞 개울가의 물이 들이치지 않는 곳에 마련했습니다.

율하유적은 현장보존과 함께 이전보존 기록 보존이 함께 이루어진 곳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율하의 출토유물과 해양세력의 무덤 솟대의 설명과 실체 출토된 유물을 볼 수 있습니다.

유적을 주제로 김해 장유로의 여행을 계획해보는 것도 의미와 함께 재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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