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길이 있는 조선 시대 해안 방어의 요충지 고성 소을비포진성

고성(固城)은 ‘무쇠로 만든 단단한 성’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곽도 철옹성에 비유하므로 고성의 본래 이름도 철성(鐵城)이라 했습니다.

이런 이름과 관련있는 철옹성인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에 위치한 소을비포진성(固城 所乙非浦鎭城)은

조선시대 남해안 방어를 위한 중요한 군사 요새였습니다.

세종30년(1448)에 세종실록 권121 최초로 소을비포가 등장하며 당시 군함 제작에 쓰일 소나무 재배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사량진이던 지명을 세조 1년(1455)에 소을비포로 바꾸었다.

포(浦)를 수호하는 수군만호영의 소재지였기 때문이다.

'소을비포성은 현의 서쪽 47리에 있으며, 성종 22년(1491)에 쌓았다. 둘레는 835척(250m)이다. 소을비포성에는 조선시대에 규모가 작은 지역의 수장인 종9품 권관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대동지지에 전한다.

군사를 불러 모으는 곳인 소모진을 선조 37년에 거제로 옮겼다가 선조 39년에 이곳으로 다시 옮겼다. 이때 지명을 소비포에서 지금의 이름인 소을비포로 바꾸었고 내륙으로 깊게 들어간 항구의

동쪽 구릉 능선 끝자락에 소을비포성을 만들었다.

평면 형태는 반원형이며, 둘레 330m, 체성의 폭은 5~6m이다. 체성을 쌓은 방법은 조선시대 읍성의 쌓은 방법과 비슷하다. 문지 3곳과 치성, 성내에는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그중 공방의 흔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출처국가유산청 국가유산 검색

국가유산포털의 정보에 고성 소을비포진성의 규모와 축조된 이유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건립 과정을 살펴보면 소을비포진성은 조선 시대 해안 방어 체계의 일부로서,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난중일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이곳은 남해안의 왜구 방어를 위해 설치된 수군 기지였습니다.

성종 22년(1491년)에 처음 축조된 후, 선조 37년(1604년)에 거제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원래 위치로 복귀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소을비포진성은 해안가의 구릉을 따라 축조된 석축성으로, 성벽의 둘레는 약 330m, 높이는 4m에 달한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일부 돌은 인근 지역에서 운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 내부에는 병영 및 군사 관련 건물들이 존재했으며, 공방과 제련 시설도 확인되었습니다.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성벽에는 동·서·북문이 배치되어 있으며, 해자와 치성이 존재합니다. 특히 북문지는 성벽을 절개하여 개구한 형태로,

초기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가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성벽의 일부는 바닷물의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 구조로 보강되었습니다.

​소을비포진성은 조선 시대 수군 만호영이 설치된 곳으로, 외침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태풍 피해가 적어 현재까지도 어선의 대피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을비포진성은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개축되었으며,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통해 당시의 군사적 운용 방식과 축조 기술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합니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에게도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트래픽이 생기지 않게 도시디자인을 합니다. 하지만 방어를 주축으로 하는 옛 성곽의 구조를 보면 들어가고 나가는 곳을 직선화하지 않아

일부러 트래픽이 생기게끔 만든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적군들의 진입을 용이하지 않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소을비포진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조선 시대 해안 방어의 핵심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유적입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와 보존을 통해 그 역사적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을비포진성은 남해안의 해상 교통로인 통영과 삼천포 사이에 위치하여,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해안 방어를 위해 여러 개의 진(鎭)과 보(堡)가 설치되었으며, 소을비포진성도 이러한 방어 체계의 일부였습니다.

​조선 수군이 주둔하며 해상 방어를 수행했던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인접한 자란도와 가용포와 함께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기여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해안 방어를 위해 여러 개의 성곽과 군사 기지가 설치되었으며, 소을비포진성은 사량성, 가배량성과 함께 남해안 방어의 핵심 기지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성은 해안에 돌출한 구릉 정상부를 성내로 삼고, 천연 해자를 갖춘 요새로 기능했습니다.

소을비포진성은 천연 해자를 활용하여 방어력을 높이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현대 군사 기지에서도 자연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해군 기지는 섬이나 반도 지역에 위치하여 접근이 어려운 지형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을비포진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조선 시대 해안 방어의 핵심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의 방어 전략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은 현대 군사 전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소을비포진성으로 향하는 도로는 무지개 빛 길이 펼쳐져 있어서 연인, 가족, 친구들과 함께 가벼운 나들이 데이트코스로도 인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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