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살이 살짝 고개를 숙일 때쯤 운동화를 신고 산책을 나갑니다.

세종이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동네에 산책코스가 많다는 거죠. 금강 변 산책길이나 자전거길, 호수공원 등은 세종의 자랑이 아닐 수 없구요. 이런 면에서 세종에서 4계절을 살아 본 저의 생활 만족도는 아주 높습니다.

오늘은 자동차 키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세종시에서 운영하는 각종 프로그램에서 '세종시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등의 타이틀에서 보게 되는 덕천군 사우가 궁금했거든요.

시내에서 멀지 않고, 인터넷 사진들에서 보이는 초록한 잔디와 한옥 처마가 인상적이어서 언젠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살랑살랑 맑은 공기 마시며 예쁜 꽃들이 핀 들판을 지나 덕천군 사우를 향해 출발~~

장군 덕천군사우

장군 덕천군사우(將軍 德泉君祠宇)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태산길 93-6)에 위치합니다. 정종의 열번째 아들인 덕천군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사당으로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우 ②내삼문 ③재실 ④문간채 ⑤외삼문 ⑥강당 ⑦제기고 ⑧일각문 ⑨묘소 ⑩신도비각 ⑪추모전 ⑫사주문 ⑬백헌상공정려 ⑭송덕조형물 ⑮송림군묘소 ⑯홍살문 ⑰종손주택 ⑱세종덕천장서각 ⑲사우말 큰우물 ⑳화장실

사우는 원래 세종시 도담동(구,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어졌지만, 건물이 낡아 영조 15년(1739)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사우 옆으로는 197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온 덕천군 묘와 신도비가 위치해있구요.

세종시청에서 약 19km 거리로 드라이브 겸 바람 쐬러 가기엔 아주 적당합니다. 오후 6시쯤의 방문이라서 혹시 입장이 안 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했습니다. 홍살문이 여기가 덕천군 사우임을 알려줍니다.

홍살문

홍살문을 지나 주차장에 주차하면 정겨운 큰우물이 먼저 보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식수 공급원이기도 했고 빨래터이기도 했던 우물이었지만 이제는 마을의 수호신으로서의 상징성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사우말 큰우물

사우말 큰우물을 지나 사우로 갑니다. 사우 안내문을 읽어보면 사당의 구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의 사당 전경에 보이는 문이 외삼문입니다.

사우 안내문과 사당 전경

외삼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이렇게 문간채를 마주합니다. 종손 주택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사우에서 종손이 사셨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곳에서 사시지 않았을까요?

외삼문

문간채와 제기고

문간채 옆으로는 새로 지어진 제기고가 있습니다. 제기고와 외삼문 사이로 멀리 추모전이 보입니다. 문간채를 마주하고 왼편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강당이 보입니다. 너른 잔디밭과 장독대가 정겹습니다.

好學崇禮(호학숭례) 라는 현판이 멋스럽죠.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2014년 새로 써서 건 현판이라고 합니다.

好學崇禮(호학숭례)

학문을 가까이하고 예를 숭상한다.

강당 현판

강당

재실, 관리사

재실에서 올려다본 내삼문입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사우입니다.

내삼문

사우 안에는 이렇게 가운데 신위가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교지가 있습니다.

덕천군은 왕자의 신분이지만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가난한 백성을 정성껏 돕고, 홍수로 발생한 수백명의 이재민을 구제하는 등 덕을 많이 쌓아 적덕공(積德公)이라는 칭호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시대의 어른이 우리 지역에 터 잡고 사셨다니 세종시의 뿌리가 더 따뜻하고 깊게 느껴집니다.

덕천군 사우

신위와 교지

사우(祠宇) = 부조묘(不祧廟)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덕천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위패에 머리숙여 인사하고 일각문을 지나 묘소로 올라갑니다. 사람의 발길이 적어서인지 일각문 가는 길에 풀이 무성합니다.

일각문

자두나무 사이로 묘소가 보입니다.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니 마을이 아늑하게 한눈에 보입니다. 덕천군께서 내려다보시면서 평안을 빌어주시겠거니 생각하니 마을이 더욱 복되어 보입니다

덕천군 묘소

묘소에서 내려오면 신도비각과 추모전이 보입니다. 신도비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지만, 군용지로 편입되며 1974년 덕천군사우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추모전은 문이 잠겨 있어 열어보지 못했는데 덕천군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도비각

추모전, 백헌상공정려

추모전을 나와 송덕조형물을 보고 송림군 묘소로 향합니다. 송림군은 덕천군의 째 아들입니다. 300m라고 쓰 있긴 한데 아주 가까웠습니다. 올라가는 길 집의 담벼락을 장식한 바퀴들이 특별합니다. '역사는 이어진다' 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제 마음대로 상상해봅니다.

아버지 가까이에 잠들어 있는 아들 송림군의 묘소입니다. 사우 한편으로 외따로 위치한 송림군의 묘소가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깔끔하게 잘 정리된 묘소가 기품있어 보였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송림군 묘소

덕천장서각에서 바라본 사우의 모습입니다. 늦은 시간에 왔지만 천천히 다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종손이 거주했을 시절에는 문중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건물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도 보고 '예(禮)'를 논했을 강당 마루에 앉아 그분들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사당 안에서는 괜한 경건함에 깊이 절하며 덕천군의 인품에 감사하는 마음도 가져봅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덕천군이 계셨으니 그 당시의 백성은 평안했으리라 생각하면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집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덕천군을 추모하며 그 정신을 본받아 살맛 나는 세종으로 가꾸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홍살문을 나왔습니다. 역사 문화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인가 싶기도 합니다. 덕천군사우에서 찾은 세종의 뿌리, 참 깊고 튼튼하지요?


{"title":"덕천군 사우에서 찾은 세종의 뿌리(구윤영 기자님)","source":"https://blog.naver.com/sejong_story/223460902490","blogName":"세종특별자..","blogId":"sejong_story","domainIdOrBlogId":"sejong_story","logNo":223460902490,"smartEditorVersion":4,"meDisplay":true,"lineDisplay":true,"outsideDisplay":true,"cafeDisplay":true,"blogDisplay":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