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화성특례시 SNS 서포터즈가 취재한 기사입니다."

안녕하세요!

화성특례시 SNS 서포터즈 이현숙입니다.

화성은 곳곳에서 문화유적을 볼 수 있어요. 남양읍 부근을 지나다 보면 화성 정원채 고가(華城 鄭元采 古家) 표지판을 만나게 되는데요. 들어가는 길이 어렵지 않아서 쉽게 다가갈 수 있어요. 대부분 아파트와 양식 건물 속에서 살아가는 요즈음의 현대인들에게 전통 주택의 의미는 희미해져 가고 있는데요. 화성의 하동 정씨 집성촌에 위치한 옛 가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우리 지역의 문화유산 따라 역사여행하기, 화성 정원채 고가

화성읍 송림동 마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정원채 고가 표지판이 보입니다. 그리고 작은 정자와 함께 버스정류장이 나타납니다. 마을길로 천천히 주춤주춤 가다 보니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싼 예스러운 기와 한옥이 나타납니다. 한눈에 단아하고 고풍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집 앞에 서니 발아래 푸릇한 풀이 수북하고 집 뒤로는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네요. 고택도 여름을 맞이하고 있구나 생각이 드는군요. 잘 보존되어 있어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그 옛날 하동 정 씨 문중의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이렇게 볼 수 있네요.

기록에 따르면, 화성 정원채 고가(華城 鄭元采 古家)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집은 경기 남부지역의 전통적인 양반 가옥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특히, 안채, 사랑채, 곳간채 등 다양한 건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 당시 양반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고요.

전체적인 구성은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가운데 앞마당을 이루는 일반적인 형태로 되어 있고요. 이 가옥은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한 공간 활용의 지혜가 돋보인다고 해요. 그래서 조선 후기 주택의 변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집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정원채 고가는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생활을 하며 거주하는 공간이라고 해서 조심히 다가갔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문은 열려있었고 아무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내부는 조용히 가볍게 돌아보았습니다.

사랑채 문에 오래된 주소와 정원채라는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리고 문패에는 후손의 이름이 적혀있었고요. 100년이 넘었을 집 주변으로 마을 사람들도 오가지 않고 고택에도 사람의 인기척도 없어서 고요하기만 한 옛집이었습니다.

안채와 아래채 사이에 양철지붕으로 덮인 우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우물 앞에 앉아서 물을 길어 올리고 했을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우물 앞 행랑마당 장독대 위엔 크고 작은 장독이 가득 올라앉아 있습니다. 볕 잘 드는 마당에서 자연적으로 숙성 발효되고 있을 된장, 고추장 간장이 담겨있었겠지요. 매년 담근 장류들이 담겨있는 장독에 먼지 앉을세라 닦고 또 닦았을 정갈한 장독들을 보니 이 집안의 옛 안주인들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규모가 제법 큰 옛 고가를 돌아보면서 그 시대를 살았을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보게 하는데요. 또한 주택의 규모로 당시의 서열과 권위를 짐작하게 합니다. 정원채 고택은 옛 가옥의 풍경만으로도 오래전의 시간으로 데려가는 특별함을 가져볼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 여행이었습니다.

정원채 고택 마을길 바로 옆으로 남양 홍씨 열녀정려문(南陽洪氏 烈女旌閭門) 있어서 걸어서 가 보았습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정려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 최태형(崔台衡)의 부인 남양 홍씨는 남편이 병사하자 식음을 전폐하며 상심하다가 두 달 후인 1783년(정조 7) 10월에 자결했다고 해요. 1787년(정조 11) 조정에서 남양 홍 씨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정려를 내렸다고 적혀있네요.

정려문은 1999년 10월 화성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계단 몇 개를 오르면 담을 두른 정려각이 보입니다.

정원채 고가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거리에 남양 향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남양 6통 마을회관 거리에서 옆길 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로 향교가 나옵니다. 마침 문이 잠겨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향교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이곳은 항시 개방은 하지 않고 공식행사가 있거나 시민들에게 전통문화체험할 기회를 제공할 때 열린다고 합니다. 건물 외부는 언제든 돌아볼 수 있어요.

향교는(鄕校)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죠. 남양 향교는 조선 태조 6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고종 1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로 부근의 풍화당도 들러 볼까요? 풍화당은 조선시대 기로소라 불리던 곳인데요. 당시 정 2품 이상의 문관을 지낸 70세 이상의 분들이 은퇴 후 지내던 곳입니다. 지금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12호로 남양리 마을의 경로당으로 활용 중입니다. 요즘 같은 여름이면 무더위 쉼터로도 이용되고요.

풍화당 앞으로는 벽화골목길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따라 나가면 남양 시장이 있어서 장보기를 하면 되고요. 남양 시장의 풍물도 즐기고 로컬푸드도 구입하고 군것질도 하면서 재래시장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남양 시장 장날은 1일과 6일입니다.

오랜 전통과 역사 속에서 고스란히 간직되어 온 화성 남양읍 주변의 문화유적을 짧은 동선으로 돌아보았습니다. 하루쯤 시간만 내면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느끼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이렇게 옛이야기를 따라서 여행하는 시간은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본 포스팅은 화성시 SNS 시민홍보단에 의해 작성된 글로, 화성시청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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