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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산길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5코스ㅣ구봉산∼엄광산, 격동의 부산 근현대사와 마주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부산을 대표하는 산,
그곳에서 '부산문화유산'을 찾아보는 답사기
「부산 산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다섯 번째 코스입니다.
/
"구봉산∼엄광산, 격동의 부산
근현대사와 마주하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5 코스 |
부산가톨릭센터 ▶ 산리마을 ▶ 중앙공원 ▶ 구봉산과 엄광산 ▶ 민주공원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 |
코스 5ㅣ구봉산∼엄광산,
격동의 부산 근현대사와 마주하다
구봉산과 엄광산은 부산항의 등줄기 역할을 하는 산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들과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과 열사들의 사연이 곳곳에 어려있어 격동의 부산 근현대사를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부산의 명동성당,
부산가톨릭센터
부마항쟁에서 6월항쟁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에 의해 형성된 헌책방 골목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이곳이 부산 민주화운동의 발상지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심에는 부산중부교회와 양서협동조합이 자리하고 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하자, 유신정권은 이들을 배후로 지목하고 양서협동조합을 강제로 해산시켜 버렸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은 1981년 부림사건을 조작하여 양서협동조합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사회주의자로 몰아 구속하였다.
그 해 10월 16일과 17일 밤 국제시장을 빠져나온 시위대가 이 고갯길을 타고 초량동, 수정동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제지하는 경찰들과 뒤엉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경험들은 모두 1987년 부산에서 6월항쟁이 폭발하는데 소중한 밀알이 되었다.
표석에 새겨진 ‘그날’의 뜨거운 기억
부산가톨릭센터가 들어선 것은 1982년 4월이다. 이후 ‘문화의 불모지’ 부산에서 갖가지 무대 예술 발표회와 고전 음악 감상회, 미술 전시회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 부산가톨릭센터는 단순한 ‘문화 사목’을 위한 기관만은 아니었다. 시대의 아픔을 종교인들도 외면하지 않았고, 특히 1987년 6월항쟁 기간에는 이곳이 서울의 명동성당 못지않은 뜨거운 현장이었다. 그 증표가 2017년 30주년을 맞아 입구 계단 옆 화단에 설치한 ‘6월항쟁의 중심지 표석’이다.
불끈 쥔 주먹 형상의 높이 1m 화강암에 저항하는 듯, 춤추는 듯한 사람의 모습과 함께 그날의 구호 ‘독재 타도’와 ‘민주헌법 쟁취’를 새겼다.
애국시민들이여, 가톨릭센터 앞으로!
아직은 6월항쟁이 초입이던 6월 8일부터 13일까지 6일 간 부산가톨릭센터에서는 ‘5·18 광주의거 사진전’이 개최되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감시하에서도 이 전시회를 연인원 6만 명이 관람하였다고 한다. 입장을 기다리는 행렬이 400m 떨어진 메리놀병원까지 이어졌을 정도로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때만 해도 5·18의 진상을 알지 못했던 부산 시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부산에서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평가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20년 5월 광주MBC와의 인터뷰에서 ‘5·18 하면 떠오르는 사람’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꼽으면서, 인권변호사 시절 함께 부산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 비디오 관람회’를 열었던 일을 언급하였다.
시민들의 응원 메시지 (전략) 17일 오전 가톨릭센터에서의 철야 농성에 참여한 우리 청년 학생 시민 일동은 한 줌도 안 되는 군부 독재 정권을 몰아낼 때까지 민주에 대한 불굴의 의지로써 끝까지 싸워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근로자, 택시 기사, 회사원 할 것 없이 모든 애국애족 시민이 총궐기하여 군부 폭력 정권을 끝장냅시다. 군부 폭력 정권이 터뜨리는 최루탄이 승리의 폭죽이 되는 그날까지 부산지역 애국 애족 시민이 하나 되어 힘차게 힘차게 전진합시다. |
산리에 올라 만난
금수현과 박기종
반갑고도 아쉬운 금수현 음악살롱
대청스카이전망대 맞은편에는‘금수현 음악살롱’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 금수현이 한때 대청동에 살았는데, 그 집의 위치가 서라벌맨션(대청북길33번길 4) 인근이라고 한다. 강서구 대저동 출생의 금수현은 1947년 경남도립 부산극장 지배인으로 발탁되면서 이곳으로 이사
하였고, 1948년 사퇴 후 부산사범학교 교감이 되었다.
이후 경남여자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2년 사망 후에는 음악의 대중화와 음악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산리에 오르니
망양로355번길을 따라 좌측 경사로로 올라가면 벽화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산의 명소와 마크가 그려진 색색깔 화분에 민들레가 소복이 피어있다. 푸른 초원과 파란 하늘에 민들레 홀씨가 흩날리고, 흰 양과 멋진 뿔을 가진 사슴, 긴 목의 기린이 어우러져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작품명은 「행복마을 산리」.
‘철도왕’ 박기종
박기종은 개항기 부산 출신의 대표 경제인이자 철도,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선각자로 이름 높지만, 화려한 수식어에 비해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
박기종은 부산지역의 치안과 무역 업무를 담당하면서 근대 기업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며 자수성가하였다. 그에게 동래 출신이란 핸디캡이 아니라 성장의 사다리였던 것이다. '박기종기념관'에는 ‘부산의 근대화를 대표하는 선각자’로 현창하는 내용들로 빽빽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마주하는
민주공원
열사, 그 뜨거운 이름
넋기림마당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열사들을 기리며 그 뜻을 아로새기는 추모의 공간이다.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보니, ‘열사烈士’란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자신의 뜻을 죽음으로써 펼친 사람을 이르는 칭호라고 한다.
부산에는 1987년 6월항쟁 과정에서 열사가 된 3명의 ‘6월민주열사’가 있는데, 바로 박종철, 황보영국, 이태춘이 그들이다.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잇고자 6월항쟁 35주년인 2022년 넋기림마당 한 켠에 추모의 벽 ‘늘빛드레’를 조성하였다.
‘6월항쟁의 도화선’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으로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은 1965년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정기는 부산시 수도국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평생을 국가를 믿고 봉직하다 정년을 한 해 앞두고 있었는데, 국가는 그에게서 금쪽같은 막내아들을 빼앗아 갔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박종철은 영남제일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쓰고 귀가한 바 있다. 이 경험은 그가 사회 모순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 황보영국의 마지막 기도
황보영국은 광주와 부산, 5·18과 6월항쟁을 잇는 열사다. 1961년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출생하였고, 1977년 성지공업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울산 현대중공업과 부산의 삼화고무, 태화고무 등에서 근무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그는 부암제일교회를 다니면서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에 눈 뜨기 시작하였다. 그는 병상에서도 신음처럼 ‘독재 타도’를 외치다가 1주일 만인 25일 새벽 끝내 운명하였다.
영원한 ‘넥타이부대’ 이태춘
이태춘은 6월항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 퇴근 후 항쟁에 참여하였던 ‘넥타이부대’의 일원이었다. 1987년 6월 18일은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경찰은 자성고가교를 통과하려는 시위대를 막아섰고, 도로와 고가교에 빽빽이 들어찬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난사하였다. 이날 이태춘은 고가교 위에 있었다. 강렬한 최루가스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본능적으로 난간 밖으로 몸을 숙였고, 아래로 추락하였으며 사망하였다. 이후 2002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시민의 뜻을 모아 세운 위령탑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을 몰아내었던 4·19혁명의 정신을 기리는 ‘4월 민주혁명 희생자 위령탑’이다. 본래 용두산공원에 있었으나 2007년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민주공원에 4·19 광장을 조성하면서 이전하였다. 영령봉안소도 건립하여 4·19 당시 부산에서의 희생자 19명,
이후 돌아가신 21명의 영정사진을 함께 모시고 있다.
원도심을 발아래,
중앙공원
이름도 볼거리도 노인도 많다
중앙공원 내에 민주공원이 있다. 한켠에 부산광복기념관도 있어, 중앙공원은 항일과 호국, 민주화의 역사가 한곳에 어우러져 있는 보기 드문 공간이다. 인근의 중앙도서관까지 더하면 원도심 일대를 고루 내다볼 수 있는 전망에 이보다 멋진 휴식처가 따로 없다.
구봉산 자락에 위치한 중앙공원 일대는 과거 한국전쟁 시기 전국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판자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970년 이들을 정리하고 시민 휴식처로 만들기 위해 대청공원이라 하였고, 1986년 다시 중앙공원으로 개칭하였다.
높고 당당한 충혼탑
부산지역 최초의 충혼탑은 1957년 6월 용두산공원에 건립되었다. 충혼탑과 충혼비 두 개의 조형물로 되어 있었는데, 1980년대 들어 충혼탑의 규모가 작고,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전이 추진되었다.
이에 1983년 이곳 중앙공원에 현재의 충혼탑을 새롭게 준공하고, 종전까지 합사하고 있던 경남 출신 영령들은 창원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구봉산, 엄광산을 거쳐
동아대로
산중에도 역사의 현장이…
숲또랑길’이라는 아치형 문이 보이는데, 이곳이 구봉산 등산로 입구다. 중간중간 갈림길이 나오면, ‘구 대신공원’, ‘구봉산 봉수대’ 등의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외적의 침범 등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전하던 조선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국경과 해안가 등 최전방의 상황이 5개의 주요 봉수 선로를 따라 한양까지 보고되는데, 구봉산 봉수대는 낙동강하구 일대와 몰운대 앞바다를 감시하는 다대포진 응봉 봉수대에서 올린 신호를 받아 황령산 봉수대로 연결하였다.
돌탑과 삼각점이 있는 엄광산 동봉에 이르면, 영도와 광안대교가 어우러진 부산항 일대는 물론, 진구와 사상구, 북구, 강서구, 그리고 김해평야 일대까지 한눈에 조망되는 장관이 펼쳐진다. 여기서 땀도 식힐 겸 잠깐 휴식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엄광산은 금정산맥의 말단부 능선 위에 솟아 있는 산으로, 남서쪽으로는 구덕산과 승학산과 연결된다. 해발 고도는 504m이다. 『동래부지』1740 산천 조에 의하면, ‘엄광산은 부府 남방 30리에 있으며, 위에 구봉이 있고 아래에 두모진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산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명칭의 유래는 전하지 않는다.
1995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지명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엄광산으로 되돌렸다.
내원정사는 조계종 사찰이다. 1973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니 전통 사찰치고는 그 역사가 매우 짧은 편이다. 그러나 사찰 운영의 현대적 시스템과 불교유치원이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산하 단체인 사회복지법인 내원을 설립하여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신흥의 대찰이다.
내원정사 옆 ‘숲쎈로드’로 내려가면 중앙공원구 대신공원에 닿는다. 이곳은 1902년 일본인들에 의해 구덕수원지로 조성된 곳으로, 1968년 폐쇄되면서 공원화되었다. 개항 후 일본인들은 보수천 물을 대나무 관으로 끌어와 사용하였는데, 거류민 증가에 따른 물 부족과 위생 문제 때문에 근대적 상수도 시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의 또 다른 주역, 동아대학교
구봉산과 엄광산 자락의 격동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서 부산이 역사의 주역이 된 부마민주항쟁을 빼놓을 수 없다. 동아대는 4·19와 한일회담 반대운동 등 1960년대 학생운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였고, 1987년에는 학원 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6월 항쟁으로 이어져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1979년 10월 17일 항쟁 2일 차는 말 그대로 동아대의 날이었다. 16일 부산대에서 교내 시위가 있었고, 시내로까지 확산되어 시민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동아대 학생들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항쟁 당시의 건물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고, 최근에는 계엄포고령과 휴학 공지를 학생들이 읽고 있는 사진 속의 옛 교문마저 철거되었다. 그러나 연좌시위를 진행하였던 도서관 앞 ‘석당정재환 동상’과 잔디밭은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모든 것을 과거 그대로 붙잡아 둘 수는 없겠으나, 아쉬운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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