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전
'오늘을 건넨 그때의 청춘' 6·25 참전 용사 손양기 어르신을 만나다
나랑 사랑 차오르는,
6·25 참전 용사 손양기 어르신
어제처럼
생생한
그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스물한 살. 소년 전차병을 꿈꾸며 고향 익산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그때가 1949년 3월 11일. 부푼 꿈을 안고 찾은 북한남동(현재 한남동) 육군독립기갑연대는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일본군 막사로 쓰던 건물에 장갑차라고는 M8 장갑차 27대뿐이었다.
훈련도 기름걸레로 장갑차를 닦는 게 전부였다. 일주일을 보내고 영등포 육군통신학교로 옮겨 갔다. 그렇게 통신병의 길에 들어섰다. 3개월간 나무 전주(전봇대)에 올라 전선을 가설하고 모스부호 짚는 법을 배우는 기초교육을 수료한 뒤 육군독립기갑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에 배속됐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1950년 6월 25일. 그에게 김포에 있는 육군공병학교 경비 임무가 떨어졌고 운전병과 장교, 포수와 함께 장갑차에 올랐다. 3일간 경비를 마친 뒤 6월 28일 한강교 경비 명령을 받고 출동했는데 다리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다시 김포로 가서 수색하라는 명령에 이동하는데 차가 자꾸만 옆으로 가더란다. 옆에 앉은 운전병을 보니 이미 사망한 채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고. 정신없이 차에서 빠져나와 영등포에서 수원, 여수, 부산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부대에 복귀했다.
나라를
지킨다는
마음 하나로
수색 명령 당시 어깨와 팔에 입은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도 못한 채 전장에 나섰다. 본격적으로 통신병 임무를 수행하면서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일본 자료로 배웠는데 전장에서는 영어로 부호를 받은 까닭이다. 그의 말마따나 ‘A, B, C, D도 잘 모르는 시절’에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전 수행뿐만 아니라 보급품을 받는 데도 암호문 해석이 필요했다.
밤잠을 설쳐가며 해석한 덕에 부대는 작전을 무사히 수행하고 보급품도 전달받을 수 있었다. “하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며 그럼에도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힘든 줄도 몰랐단다. 흥남철수작전을 비롯한 설악산전투, 금성지구전투 등에서의 활약은 은성화랑무공훈장, 금성화랑무공훈장 수상으로 이어졌다.
1955년 2월 1일 제대 후 고향 익산에 돌아와 34년간 철도공무원으로 재직했다. 현재는 대한민국무궁수훈자회 익산지회를 창설해 참전 용사들의 복지 증진과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고.
입대를 앞두거나 복무 중인 후배 군인들에게 “군인은 국가의 명령에 살고 죽는다는 신념으로 살기를 바란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영웅의 제복’(2023년 6·25 참전 용사에게 지급한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여전한 기백을 드러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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