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이 있었다고?

생각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의미 있는 공간이 많습니다.

자주 다니는 집 앞 골목길이지만 관심을 두지 않으면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알기 어렵죠.

2년간의 기자단 활동을 통해 울산의 여러 동네와 골목을 다니면서 보게 된 울산의 풍경들은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울산이라는 도시와는 또 다른 모습들이었습니다.

학산서원

새롭게 들어선 도심을 따라 깔끔하게 정비가 된 곳도 있었고, 이제는 사라진 철길을 따라 과거의 시간을 만날 수 있는 마을 길도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사람들과 함께 해 온 마을의 보호수가 여전히 터줏대감처럼 떡 하니 위용을 자랑하는 동네도 있었고 좁디좁은 깔딱 고개를 넘어서자 탄성을 자아낼 만큼 멋진 경치를 자랑하는 곳도 있었죠.

그런 울산의 다양한 모습들, 얼굴들을 기자단 활동을 통해 만날 수 있어, 또 이렇게 하나의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2년간의 기자단 활동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기사는 어떤 기사로 쓸까, 많은 고민을 했지만 너무 힘을 주어 쓰기보단 아직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그렇지만 가치 있는 곳들의 모습을 남겨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존양재

오늘 소개할 학산서원은 지역에서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울산은 물론 우리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흔히 '태화산'이라 불리는 태화 근린공원 산책로를 자주 이용하시는 분들이라면 지나가는 길에 한옥으로 된 이곳을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우리 지역의 시간을 간직한 또 하나의 장소, 중구 학산서원을 소개합니다.

사당인 존덕사

울산시 중구 태화동에 위치한 학산서원은 울산 박씨 대종회에서 건립한 사립교육기관입니다.

학산서원이 최초로 건립된 시기는 조선 후기인 1851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최초의 서원이라고 알려진 영주의 소수서원이 1543년에 세워졌으니 학산서원의 건립은 꽤나 늦은 편입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은 한창 외세가 밀려들고 새로운 학문이 유입되던 시점이니 당시에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교육적인 목적에만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학산서원의 시작은 지금 현 위치가 아닌 경남 양산시 용당동에 용강서사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고 말았죠.

이후 1905년과 1940년에 보수와 개축을 진행했고 1973년에 한차례 더 보수를 거친 뒤 198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죠.

조선시대 서원은 양반들이 자체적으로 세운 사립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향교는 국공립 중-고등학교, 서원은 사립 중-고등학교인 셈이죠.

앞서 언급했듯 학산서원은 울산 박씨 대종회에서 세웠습니다.

우리나라 토종 박씨의 시조는 박혁거세인데 설화에서 보듯 박혁거세는 경주에서 태어났죠.

이 박혁거세를 박씨 성의 첫 번째 시조로 하고 그 뒤로는 여러 후손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입향조가 되어 분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요.

울산 박씨의 입향조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울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박윤웅이라는 인물입니다.

박윤웅은 [고려사]에도 이름이 남아있는 인물로, 고려 개국공신으로 올라있는 인물이죠.

오른쪽에 보이는 푸른 지붕이 추원재다.

박윤웅은 울산 일대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이었는데 경주를 중심으로 하던 신라가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자 고려에 투항하여 울산 지역의 지배권을 오랫동안 인정받았습니다.

오늘날 북구 달천동의 달천 광산에서 생산된 철을 바탕으로 울산항을 통해 교역으로 부를 축적,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박윤웅과 일화가 있는 곳이 바로 북구 강동동에 있는 곽암인데요.

울산 지역의 호족세력 정비에 공을 세운 그에게 왕건은 미역바위 12구를 상으로 내렸습니다.

추원재의 입구인 충의문

지금이야 미역을 양식을 통해 채취할 수도 있지만 과거에는 자연에서 나는 미역의 생산지역이 한정적이었고 그만큼 희소성이 높아서 세금으로 납부가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곽암에서 생산된 미역은 왕에게 진상품으로 바칠 정도로 그 품질이 좋았다고 하니 박윤웅에게 하사된 곽암은 그야말로 금이 나는 금광과 다를 바가 없었죠.

박윤웅에게 하사된 곽암의 미역 채취권은 이후 조선시대까지도 울산 박씨 문중에게 이어졌는데 18세기 곽암 주변의 다른 바위에서는 미역이 잘 나지 않는 반면 곽암에서는 여전히 미역 생산량이 높았는데, 이에 마을 사람들이 관아에 이의를 제기하여 곽암에서의 미역 채취권을 나누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리에게 암행어사로 잘 알려진 '박문수'가 이때 활동했는데 박문수가 당시 일대 주민들의 청을 받아들여 곽암 소유권을 모두 국가 소유로 환수했으나 이후 3년간 곽암에서의 미역 생산이 급감했고 사람들은 박윤웅이 노해서 더는 미역을 채취할 수 없게 되었단는 소문이 돌게 되었습니다.

추원재

이에 사람들은 다시 박씨 문중에게 곽암을 돌려줄 것을 간청했고 환수했던 곽암의 미역 채취권 중 일부를 다시 박씨 문중에게 돌려주었더니 다음 해부터는 미역 생산량이 다시 높아졌다고 합니다.

바다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 위치한 서원이지만 학산서원이 추모하는 인물, 그리고 건립 배경을 살펴보면 먼 과거의 울산의 이야기까지 엿볼 수 있죠.

학산서원은 출입문 역할을 하는 외삼문, 학산서원 편액이 걸린 교육공간 강당이 있고 그 옆으로는 동재인 존양재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서원 양식에서 동재와 서재가 함께 위치하는데 학산서원에는 서재는 없고 동재만 남아있습니다.

학산서원 전경

존양재 옆으로는 학강헌이라는 종택이 있고 계단을 오르면 사당인 존덕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당 옆으로는 박윤웅의 생애와 업적을 새긴 비석과 정려각이 함께 있죠.

머지않은 곳에 충의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추원재 사당이 있습니다.

학산서원 내 건물들은 모두 우리가 알고 있는 흑색의 기와를 쓴 반면 이곳 추원재의 기와는 푸른빛을 띠는데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주변에서는 독특함을 자랑합니다.

추원재는 물론 사당인 존덕사에 올라 바라보는 중구 일대의 풍경은 주변 그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멋진 경치를 자랑합니다.

학산서원에 오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죠.

이정표도 딱히 마련되어 있지 않고 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운 곳이기에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서원철폐령으로 한차례 아픔을 겪었던 만큼 같은 아픔을 겪지 않고 오래오래 지금의 자리에 남아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해당 내용은 '울산광역시 블로그 기자단'의 원고로 울산광역시청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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