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을 모시는 종교의

국가적 기능까지 충실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 천년고찰 공주 동학사를 흐르는 계룡산 계곡의 수려한 풍광.

자연의 리듬은 언제나 인간을 앞서가듯

산을 오르는 바람은 언제나 먼저 도착해 솔잎의 숨결을 흔듭니다.

장마 사이 잠시 내민 초여름 햇살이 대웅전 기와에 작은 파문처럼 번질 때

고요한 천년사찰은 목탁 소리도 없이 묵언을 따라 오랜 수행을 걷습니다.

어제 핀 꽃은 오늘 지고, 오늘 돋은 잎은 내일의 그늘이 되듯

돌계단의 시간은 발끝마다 무릎을 접고

아득한 그리움 하나를 껴안습니다.

계룡산 동쪽 자락에 기댄 천년고찰 동학사에서

한 칸의 불빛보다 깊은 내 마음의 여름이 시작됩니다.

동학사(東鶴寺)는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입니다. 계룡산 동쪽의 계곡 상류 부근에 사찰이 있어 계곡을 따라 연천봉을 오르거나 남매탑을 지나 금잔디고개를 넘으면 서북방면으로 갑사(甲寺. 충남 전통사찰 11편 참조)와 삼불봉 고개에서 관음봉을 지나면 서남쪽으로 신원사(新元寺. 충남의 전통사찰 10편 참조)로 계룡산 3대 사찰이 서로 연결됩니다. 천년고찰인 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복장전적(보물), 청량사지 칠청석탑(보물)과 오층석탑(보물), 삼성각(충남 문화유산자료), 삼층석탑(충남 문화유산자료), 숙모전(충남 문화유산자료), 삼은각(충남문화유산자료) 등이 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 전경.

창건은 중국 당나라 스님 상원 조사의 상원암에서 기원을 찾고 있습니다. 상원이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회의 화상이 724년(신라 성덕왕 23) 쌍탑과 함께 사찰을 건립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사찰명은 청량사(淸凉寺)로 920년(고려 태조 3) 도선국사가 중창하면서 왕실의 복을 비는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가, 936년(태조 19) 신라 유신 류차달이 사당과 사찰을 확장해 지금의 동학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절 동쪽에 학(鶴)모양 바위에서 따 왔다는 설과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성리학(東方理學)의 조종인 정몽주를 제향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 삼존불.

나라의 충신을 경내에 모시면서 종교의 국가적 기능에 충실했다는 점은 동학사가 다른 천년고찰과 차별되는 큰 특징입니다. 숙모전(肅慕殿)과 삼은각(三隱閣)이 경내에 있으면서 이미 멸망한 이전 왕조 충신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신라 유신은 류차달은 고려 초 신라 시조와 충신 박제상을 위한 사당을 지었고, 1394년(조선 태조 3) 고려 유신 길재는 동학사 운선스님과 단을 쌓고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1399년(태조 8)에는 고려 유신 유방택이 정몽주와 이색, 길재 등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듬해인 1400년에는 공주 목사 이정간이 단의 이름을 삼은단으로 하고 삼은각을 지어 조선 개창 이전의 고려왕조의 충신들에 대한 제사를 지냅니다. 1475년(세조 3)에는 김시습 등이 삼은단 옆에 새로운 단을 쌓고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는 한편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는데 이듬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동학사를 방문, 조카 단종과 정순왕후, 동생인 안평대군 그리고 계유정난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김종서, 사육신 등 280명의 성명을 비단에 적어 초혼제를 지내 주고는 동학사 현판을 사액하고 인신과 토지를 하사해 제사를 이어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에서 충신을 모시는 숙모전 전경.

이처럼 충신을 모시는 동학사는 1728년(영조 4) 신천영의 난을 겪으면서 초혼각을 비롯한 절의 전각이 소실되고, 1785년(정조 9년) 정휴겸이 위토를 팔아 제사중단의 위기를 겪습니다. 다행히 1814년 (순조 14) 월인 스님이 예조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사옥과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세웠고, 1827년(순조 27) 홍희익이 인신을 봉안하는 집을 따로 세우고, 충청좌도 어사 유석과 정하영의 시주로 다시 제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찰에서 충신들의 제사를 모시는 것에 대해 ‘숭유억불’을 내세운 유생들의 입장은 여간 불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부 지방 유생들이 동학서원(東鶴書院)을 만들어 제사를 모시는 등 갈등을 겪다가 의금부의 수사까지 벌어지면서 결국 서원을 헐고 승려들에게 충신들의 제사를 이어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동학사는 충신의 제사를 모시는 국가적 의미를 이어갔는데 1864년(고종 1) 보선 스님이 이전 건물을 모두 정비하고 초혼각 2칸을 짓고 1904년 초혼각을 숙모각으로 바꿔 부르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한국전쟁 과정에서 모두 소실되어 1960년 이후 중건에 나서게 됩니다. 1965년 승가대학으로 사용하는 육화원(六和院)과 강설전(講說殿)을, 1972년 염화실(拈和室) 범종루(梵鐘樓), 1980년 대웅전, 1984년 조사전, 1985년 요사인 설향당, 1986년 화경헌, 1990년 실상료를 각각 신축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승가대학 강설전 전경.

동학사를 향하는 길에는 특이하게 홍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향교나 서원이 아닌 절에서 홍살문을 보기는 드문 경우인데, 역사적으로 인도의 스투파(탑) 앞에 세우던 '토라'(Torana)가 그 뿌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북방으로 중국에서는 ‘패방(牌坊)’으로 한국에서는 ‘홍살문(紅箭門)’으로 일본에서는 ‘토리이(鳥居)’로 이어졌고 남방에서는 베트남의 ‘탐꽌(三關)’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1500년 전 마을 풍경을 묘사한 그림인 청양 칠갑산 암각화에도 홍살문의 형태를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홍살문 문화가 백제 등 삼국으로 전파되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 계룡산동학사(鷄龍山東鶴寺) 현판의 일주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경내로 접어듭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홍살문 전경.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일주문. 계룡산동학사 현판이 걸려 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일주문의 화려한 천정 단청.

동학사 가람배치는 절 앞의 계곡을 따라 동서방향으로 길게 이어집니다. 남과 북쪽 능선이 병풍처럼 가로 막혀 협소하기 때문으로 대웅전 앞 계곡을 따라 자연석으로 석축으로 쌓아 앞뜰을 만들고 가람을 배치했습니다. 대웅전 마당의 삼층석탑은 원래 ‘청량사(남매탑이 있는 곳)’에 있던 것을 옮긴 것입니다. 1층 기단에 3층 탑신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탑인데 탑신부 3층의 몸돌과 상륜부의 노반 이상 부분은 없어져 안타까움을 주고 있습니다. 기단 맨 윗돌은 탑신의 지붕돌과 같이 윗면에 비스듬한 경사를 두었고,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습니다. 적당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새겼습니다. 723년 동학사를 처음 지을 때 함께 세워두었다는 얘기가 전해지지만, 탑의 양식이나 다듬은 솜씨 등으로 미뤄 고려시대 유산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가람은 계곡을 따라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 앞 뜰의 삼층석탑.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 앞 뜰의 좌우석등.

대웅전은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 규모에 남향으로 세워진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입니다. 석조 기단 위에 주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화려한 문살로 소목장의 솜씨를 뽐내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 불단을 조성해 삼존불을 봉안했는데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아미타래와 약사여래가 좌우 협시불로 배치되었고, 후면으로 목각삼불회탱이 걸려 있습니다. 동쪽의 벽면에는 약사탱화와 신중탱화가 서쪽 벽으로는 아미타탱화와 현왕탱화가 걸려 있는데 이들은 모두 1898년(광무 2)에 조성된 것입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 현판.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의 화려한 단청과 익공포,

삼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은 조성 발원문을 통해 1606년 제작된 과정 및 참여한 제작 주체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어 조선 중·후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되는 자료인데 17세기 등장한 대중적인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조각에 참여한 석준(釋俊), 각민(覺敏) 등은 16~17세기 조각승들로 당시 화승 활동과 교류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도상 역시 임진왜란 이후 비로자나삼불상과 함께 크게 유행한 석가여래삼불 형식을 정확히 보여주며, 발원문에 정확한 존상명칭을 기록하고 있어 이후 전개될 석가여래삼불상 도상연구에도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의 탱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복장전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腹藏典籍)은 동학사 대웅전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에서 발견된 불서들로 모두 임진왜란 이전의 간사본입니다. 이 가운데 희귀본과 귀중본, 완전본 등의 조건을 고려해 7종 8책이 국가지정문화유산(보물)으로 지정됐는데 목록으로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권4. 권6)을 비롯해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언해(권6), 육경합부, 묘법연화경언해(권2),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불조삼경, 지장보살본원경 권하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장전적 등 복장유물 전체가 동학사에 보관되지 않고 서울 종로구 조계사 내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재하고 있어 환수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상 복장전적.

대웅전을 돌아 서쪽 뒤편으로는 삼성각이 있습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장대석을 외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습니다. 전면 3칸은 모두 띠살문을 달았고, 오른쪽 앞칸에는 외닫이 문을 달아 평상시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단을 설치하고 중앙에 칠성탱화를 좌우에 산성탱화와 독성탱화를 모셨습니다. 삼성은 도교와 토속, 불교신앙의 표현으로 외래종교인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신앙적 요소가 합쳐진 것입니다. 이 가운데 칠성은 북두칠성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산신은 우리 고유의 산악숭배 토속신앙으로 호랑이와 함께 나타나는데 재물을, 독성은 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닫고 성인이 되어 말세 중생에 복을 내린다고 합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삼성각 전경.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삼성각 탱화..

삼성각의 왼쪽에는 조사전에 이어 승가대학으로 사용되는 강설전과 실상료(실상선원)가 있고 앞쪽으로 설향단과 황경헌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웅전의 오른쪽 육화원 역시 승가대학으로 사용중인 전각입니다. 실상선원에는 동학사(東鶴寺)의 사액이 붙어 있는데 우리나라 근대 불교의 선풍을 진작시킨 경허 스님이 토굴을 짓고 참선 삼매에 들었을 때 이곳을 살상암으로 불러 그 뜻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동학사의 강원(승가대학)은 경북 청도 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이름이 높여온 곳입니다. 조선 후기 여러 강백이 맥을 이어온 데다 불교 정화 운동 이후 50여 년 엄격한 규율로 많은 비구니를 배출해오고 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숭가대학 실상선원. 동학사 현판이 걸려있다.

앞서 동학사 변천 과정에서 간단히 설명하듯 계룡산 초혼각지는 세조가 단종과 사육신 등 충신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던 초혼각(招魂閣)이 있던 자리로 현재는 이곳에 동학삼사인 숙모전(肅慕殿), 삼은각(三隱閣), 동계사(東鷄祠)의 3곳의 사당이 세워졌습니다. 전각별로 숙모전에는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거부한 충신을, 삼은각은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고려의 충신을, 동계사에는 신라의 충신 박제상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보통 불교 사찰에서는 교리와 경전을 나타내는 대웅전 등의 건물에는 전(殿)을, 불교경전 이외의 건물에는 각(閣)을 주로 사용하는데 숙모전은 왕을 모신다는 의미에서 전(殿)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숭모전은 공사관계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숙모전은 이처럼 아버지 문종에 이어 어린 나이에 조선 6대 국왕에 올라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단종(1441∼1457)과 그의 폐위와 죽음을 목숨으로 막기 위해 노력한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이곳에는 1458년에 세조가 직접 찾아와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단종과 정순왕후, 안평대군, 금성대군 그리고 중신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 280여 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기도 했는데 이후 신분과 관계없이 국왕, 재상, 관료, 학자, 서민, 노비 등 충절인 351위를 기리는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제사의 의식을 거행하는 특별한 전통을 지닌 곳이 되었습니다. 1728년(영조 4) 불에 탔다가 1827년(순조 27) 다시 세웠고, 1864년(고종 1) 초혼각 북쪽에 단종의 위패를, 동벽에 고려 후기 충신 7위를, 서벽에는 사육신 등 7위를 모셨습니다. 1904년(고종 41) 사당 이름을 숙모전으로 바꾸고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도 함께 모시게 되었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동학사에는 절의를 지킨 충신을 모시는 제례가 운영중이다.

오른편의 삼은각은 고려 때 절의를 지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 삼은(三隱)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이들은 모두 고려를 대표하고 조선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던 유학자들로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고 고려에 끝까지 충절을 지켜 ‘삼은’이라 일컬어집니다. 1399년(정종 1) 고려 유신 유방택이 삼은의 초혼제를 지낸 이래 삼은단이라 했는데 세조 때 유방택과 이숭인, 나계종을 추가하여 6인의 제사를 지냈지만, 이후에도 전각의 이름은 그대로 삼은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어 동계사는 신라 19대 눌지왕 당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출하고 일본에서 순절한 박제상을 936년 류차달이 초혼하여 제사를 지내고 왕명으로 동계사를 건립했는데 철향되었다가 1956년 중건될 때 류차달도 함께 추배하였다고 합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동학사에서 충신을 모시는 삼은각과 동계사.

이와 함께 동학사 청량사지에는 ‘남매탑’이라 불리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646년(신라 선덕왕 15) 승려 상원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목에 커다란 뼈가 걸려 어려움에 부닥친 호랑이를 구해주었는데,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고 합니다. 상원은 기절한 처녀를 정성껏 간호해 소생시켰고 그 처녀는 상원의 아내를 소원했지만, 상원은 처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매가 될 것을 제의해 두 사람은 비구와 비구니로 수행하다가 한날한시에 열반에 들었고 이 소식을 들은 처녀의 아버지가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이들 석탑은 1950년대 어떤 이유에선가 무너져 있던 것을 1961년 복원하였습니다.

▲ 천년고찰 공주시 동학사 청량사지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남매탑).

칠층석탑은 1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으로 전체적으로는 폭이 좁으면서 길쭉한 형태입니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을 딴 돌로 세운 점이 특이한데 탑신의 1층 몸돌 한 면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를 새겼습니다. 탑신 몸돌 위의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1층 2단, 7층 1단으로 2, 3, 4층은 후대에 만든 것으로 원래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2층 지붕돌 낙수면 경사가 1층보다는 급하지만 2∼7층까지 몸돌이 줄어드는 비율이 그리 높지 않고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이를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습니다. 전체적인 수법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에서 이어지는 양식을 보여주는 가운데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과 세부적인 조각 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고려 중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어 오층석탑은 1단의 기단에 5층 탑신을 얹었습니다. 바닥 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돌로 짰는데 기단의 가운데 기둥을 별도의 돌로 끼운 특징을 보여줍니다. 탑신의 지붕돌은 얇고 넓어 균형과 안정감에서 다소 비대칭적입니다. 1, 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으로 모두 딴 돌을 끼워 넣은 구조이며, 3, 4층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으로 4층 지붕돌 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의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지만,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로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 장식만 남아 있습니다. 전체적인 조성수법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과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보물)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부 손실이 있지만, 상측으로 올라갈수록 과감한 생략과 세부적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등 칠층석탑과 같이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 시대 한 절에 특징이 다른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 최근 장마철 폭우로 동학사에서 관음봉 삼거리 구간이 전면 통제중이다.

공주시 동학사

○ 위 치 :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 운 영 : 연중무휴 무료입장 (일몰 이후 출입제한)

○ 주차장 : 국립공원계룡산 공영주차장(소형 4000원)

* 취 재 : 2025년 6월 20일 등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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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묘신. (2022). 동학사의 동학삼사(東鶴三祠)연구. 불교문예연구, 19, 115-147.

정은우. (2012). 동학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조각승 각민. 한국학35(4), 241-265.

Kim, J. C.외 계룡산 청량사지 오층 및 칠층석탑의 종합 풍화훼손도 평가.

장길수. (2015). 계룡산 동학사와 동학삼사. 충청학과 충청문화, 21, 215-235.

전통사찰총서 12 - 대전·충남의 전통사찰 1, 사찰문화연구원, 1999년

충남지역의 문화유적 2-공주편(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8)

충청남도지정문화재해설집, 충청남도, 2001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정보(https://www.khs.go.kr)

충남디지털문화유산(https://www.chungnam.go.kr)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https://www.aks.ac.kr/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휘리릭님의 글을 재가공한 포스팅 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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