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산

편안할 영(寧)과 넘을 월(越)

바깥 공기가 제법 시원해졌다. 긴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다시 시작된다고 하던데, 영월은 어쩐 일인지 가을 냄새가 짙어지고 있다. 하늘은 맑은 파랑이고 바람은 선선하고 새벽 공기는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낮에 조금만 걷다보면 당장 계곡이나 강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는데, 오늘은 ‘물에 들어가면 춥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호기롭게 신상 수영복을 두벌 구매했다. 올해에는 꼭 물놀이를 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강도 좋고 계곡도 좋고 바다도 좋았다. 어디든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몸을 담그고 놀다가 지치면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태닝도 좀 하고, 그러다 또 더워지면 물속으로 들어가는 휴가를 꿈꾸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해에는 신상 수영복을 입지 못했다. 딱히 일에 치여서 휴가를 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여름 휴가를 일주일 정도 다녀오기도 했는데, 휴가지가 산이었을 뿐이다.

내가 산으로 휴가를 갔다는 소식을 SNS에 올리자, 이 이야기를 접한 지인들이 내게 말했다. ‘ㅋㅋㅋ 너는 산에 살면서 왜 또 산으로 휴가를 갔니?’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산에 살면서 여름 휴가를 또 산으로 정했던 거다. 기껏 수영복도 사 놓은 채 말이다. 이렇게만 글을 쓰면 내가 산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또 막 산이 좋아서 산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다. 물도 좋아한다. 어쨌든 산에도 계곡이라는 물이 있으니까 물놀이를 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어렵게 잡은 휴가날에는 또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산에 살면서 다른 동네 산으로 휴가를 가던 날, 대한민국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일주일 내내 그칠 생각이 없었고, 결국 나는 일주일의 휴가 내내 숙소 툇마루에 앉아 비만 바라보다 돌아왔다. 멋진 봉우리에 올라 사진을 찍는다 거나, 근처 계곡에서 물놀이를 한다 거나, 하다못해 등산로를 산책하겠다는 모든 계획은 무산되었다. 남쪽 바닷가는 날씨가 정말 좋아서 많은 피서객들이 몰렸다는 소식과 물 난리로 수재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뉴스에 어지럽게 등장하는 동안, 나는 산속에서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비구경만 실컷 했다.

심지어 그렇게 산에서 머물던 일주일 동안 내내 비가 내렸으면서, 막상 휴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날씨가 어찌나 맑던지, 하늘에 대놓고 화를 낼 뻔했다. 짐을 모두 챙겨서 산을 내려온 뒤, 내가 일주일간 머물었던 산을 바라보는데 어찌나 영롱하고 맑은 지… 괘씸하다는 생각까지 잠시 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산은 그냥 거기 있었고, 마침 비가 그곳에 쏟아졌을 뿐인데. 아쉬움을 남겨놓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청명한 우리 동네 산이 나를 반겼다. 다른 산 구경하느라 수고 많았네. 하며 위로를 건네는 모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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