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전 이곳에서

백제 부흥의 꿈을 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미륵사지입니다.

백제시대 익산의 위상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귀중한 유적지로 국보인 미륵사지석탑국립익산박물관, 어린이 박물관이 있습니다.

특히 미륵사지석탑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석탑 양식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석탑입니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7월 열린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된 한국의 12번째 세계유산으로

공주의 공산성,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부여 나성,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창건해 500년의 한성백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고구려의 위협으로 계속 남하하면서 공주와 부여로 수도 천도가 이루어졌는데요,

백제의 부흥을 꿈꾼 30대 무왕에 이르러 수도를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하기 위해 세운 것이 왕궁리 유적지미륵사지입니다.

미륵사지를 가장 아름답게 바라보는 포토존인데요,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연못에 반영된 미륵사지가 볼만한 곳입니다.

미륵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용화산 밑 큰 연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가 무왕과 함께 용화산에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다 연못가에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무왕에게 큰 가람을 세우자고 제안했고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못을 메워 601년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하는데요,

두 군데 연못에서 바라보는 미륵사지석탑 풍경은 늘 경이롭기만 하는 곳이랍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거의 70m 정도 떨어졌는데요, 석탑 뒤로 금당과 강당, 승방 등이 있었기에 미륵사가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서탑과 동탑 앞에 각각 하나씩 있었고 당간지주가 세워진 통일신라시대까지 미륵사가 존재했으니

만약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면 아마 세계적인 사찰이 되었을 것입니다.

국보 미륵사지 석탑(서탑)입니다. 반대편에 보이는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만약 훼손되지 않았다면'을 가정해 1993년 복원 완료한 미륵사지 동탑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서탑)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지만,

서탑이 동탑과 같을 것이란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조성한 석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륵사지는 가운데 목탑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탑이 하나씩 있었고

그 뒤로 각각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금당 뒤로 강당과 공방, 승방 등이 있었다고 발굴조사 결과 알려졌습니다.

현재 보고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2001년 해체를 시작해 2010년 해체 완료했고

이후 복원을 시작해 2022년 8월 7일 해체를 시작한 지 22년 만에 일제 강점기 당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미륵사는 조선시대인 17세기 경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가운데 있던 목탑은 조선시대 이전에 불에 타 없어졌고 동탑은 조선시대 들어 무너졌으며 유일하게 서탑만 남아 있는데요,

그마저도 일제강점기인 1915년 석탑의 일부가 무너지자 전체가 붕괴될 것을 우려해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덧씌워 보수한 것입니다.

사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고 한가운데는 석탑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인데요,

2009년 해체 수리 중 탑신 내부 심주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639년 탑을 건립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석탑의 많은 부제를 마지 목재처럼 하나씩 다듬어 짜 맞췄다는데요,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양식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석탑 주변으로 길이 8m 20cm에 6m에 이른 'H'자형 석렬 구조도 확인돼

돌을 하나씩 들어 올린 거중기 시설도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석재를 다듬는 기술은 물론

건축에서도 거중기 등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탑신은 현재 6층까지 남아 있지만, 9층 석탑이라는데요, 동쪽에 9층으로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과 같았을 것이란 추측은 하지 말아 주세요.

복원 당시에도 아무도 알 지 못하는 "9층까지 복원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남아 있는 6층까지도 완전히 복원해야 한다"라는 등 말이 많았지만, 해체 복원 당시 그 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은 부족한 근거를 대신한 역사성과 진정성 차원에서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륵사지 석탑 뒤로는 금당지입니다.

금당이란 절의 본당으로 부처님을 모신 법당입니다.

탑이 세 개가 있듯이 법당도 세 개가 있어 3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는데요,

각자의 가람은 회랑으로 서로 이어졌고 맨 뒤에 강당을 공유해 전체를 하나의 사원으로 볼 수 있는 아주 독특한 가람배치라고 합니다.

우물 터도 있더군요.

우물 터 앞까지 강당지가 있고 우물 터 뒤로는 조선시대 건물지가 발견되었다는데요,

우물 터 주변으로 공양간 등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와 가마터도 있습니다.

미륵사지에는 모두 세 곳의 가마터가 있는데요, 맨 위쪽부터 조선시대 와요지, 고려시대 와요지, 통일신라시대 와요지입니다.

즉,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위로 올라가면서 계속 가마를 세워 기와 등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마터 주변에서는 암막새, 명문기와, 평기와 등 수많은 기와 편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정덕 9년 명문와(1514년), 만력십오년 명문와(1587년), 성화십사년 명문와(1478년),

성화이십년 명문와(1484년) 등으로 조선시대 가마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륵사지 주변에는 수많은 부재들이 쌓여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재와 동탑 주변 발굴 작업 등을 통해 모아놓은 부재들인데요,

석탑뿐만 아니라 강당이나 금당, 석등 등 사찰에서 돌을 사용하는 부재는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있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익산 미륵사유지는 현재 중앙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앙 목탑 터를 발굴조사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화재로 멸실되었다는데요, 1981년과 94년에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구체적인 축조기법과 규모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서탑과 동탑보다 먼저 조성되었다는 중앙목탑지 발굴조사로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

미륵사지를 디지털 기술로나마 완전히 복원되길 희망해 봅니다.


글, 그림 = 심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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