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공중파 TV에서

오랜만에 정통 사극인

<고려거란전쟁>이 방영되며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방의 패권을 차지한 거란의 요나라는

고려를 끊임없이 위협했고,

작은 국지전은 물론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침입이 있었습니다.

그 위기 속에서 '양규, 김숙홍,

강감찬, 강민첨, 하공진, 지채문'

수많은 명장과 충신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중에서도 충절공 하공진(河供振),

은열공 강민첨(姜民瞻) 장군

고려사에 진주 사람으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번에는 두 장군의 흔적을 따라가며,

역사 속 충절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경절사(擎節祠)

이곳은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해 있으며,

하공진(河供振)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정기적으로 향례를 올리는 장소입니다.

진주성의 입구인 공북문과 촉석문을 지나

영남포정사를 지나면 만나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진주시 수곡면에 사당이 있었으나,

199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사당은 현재 문이 닫혀 있어

내부 출입은 어렵지만,

낮은 담 너머로 사당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하공진 장군

994년(고려 성종 13년),

거란으로 향하는 길목인 ‘진도(津渡)’를 관할하던

압강도구당사라는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목종 대에는 정5품 중랑장을 지냈고,

1009년 현종이 즉위하는 데 공을 세워

상서좌사낭중에 올라 문신 관직까지 부여받았습니다.

1010년, 하공진 장군은

변방에서 침입한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나섰습니다.

같은 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자,

남쪽으로 피난한 현종을 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과의 철수 교섭을 자청합니다.

그는 자신을 인질로 삼는 조건을 내세워

거란군의 철수를 이끌어내며

나라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웁니다.

이 공로로 인해 고려는 이후

약 8년간의 평화로운 시간을 확보하며

거란의 3차 침입에 대비해

군사력을 정비하고 국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진주성 북장대(北將臺)에 올라 바라본

경절사의 전경입니다.

하공진 장군의 인품과 교양,

문무를 겸비한 모습을 높이 평가한

요나라 성종은 그를 연경으로 이송한 뒤,

강제로 양가의 딸과 혼인시키는 등

여러 차례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하공진 장군은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공진 사적비

경절사 앞에는 하공진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사적비가 우뚝 서 있습니다.

이 비석은 1969년, 장군의 후손들이

그의 충절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비석은 방형 대좌 위에 거북 모양의 비좌가

한 돌로 조각되어 있으며,

비신 위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입체감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방에는 구름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연경에서 감시를 받던 하공진 장군은

평소 저자거리에서 몰래 준마(駿馬)를 사들여

고려로 돌아가는 길목에 미리 배치해 두는 등

탈출을 준비했지만, 끝내 발각되어 붙잡히고 맙니다.

장군은 이후 협박과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저는 우리나라(고려)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구(거란)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로 굳은 의지를 표명하였습니다.

​기록에는 내장을 뜯기는

극형에 처해졌다고 하는데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나라를 향한 애정과 충성심,

용기를 잃지 않은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은열사(殷烈祠)

고려거란전쟁의 또 다른 주역,

강민첨(姜民瞻) 장군의 탄생지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진주시 옥봉동 622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장군의 충절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에 사당인 '은열사'가 세워졌습니다.

현재 은열사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강민첨 장군은 흔히 무관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본래는 문신 출신으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한 인물입니다.

​1012년 현재의 포항 일대인

청하현, 영일현, 장기현에

동여진이 침공할 때

수군 지휘관으로 전멸시켰습니다.

『고려사 열전』에는

“서생으로 기용되었으나

의지와 기개가 굳고 과단성이 있어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전장에서도 용감하고,

탁월한 판단력을 지닌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던 것 같습니다.

경절사 안에는

강민첨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개경재 유허비(開慶齋)가 있습니다.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강민첨 장군은

도원수 강감찬과 함께 부원수로 출정해

흥화진, 자산, 연주 일대에서 거란군을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1019년 3월 10일, 귀주에서는

10만에 달하던 거란군을 천여 명만 남기고

거의 전멸시키는 귀주대첩의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승리로 고려는

거란, 송과 대등한 관계 속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귀주대첩은 훗날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우리 역사 속 3대 대첩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초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민첨 장군의 모습입니다.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최근 진주청동기박물관 <옥봉> 특별전에서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어 촬영했습니다.

한편 1788년(정조 12년),

진주 병사 이연필의 지시에 따라

화공 박춘빈이 옮겨 그린 모사본(보물 제588호)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려졌지만

원본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모사된 작품으로,

고려시대의 복식과 인물 표현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 초상화가 많지 않은 만큼,

이 그림은 TV와 영화에서 고려 사극을 고증할 때

소중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진주향교

진주시 옥봉동에 위치한 진주향교

고려 광종이 958년에 과거제를 시행한 이후,

987년(성종 6년)에 향학당으로 세워져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398년(조선 태조 7년),

공자를 모신 문묘가 세워지면서

지금과 같은 향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하연의 「사교당기」에는

고려시대에는 강민첨이,

조선 초에는 하륜, 정이오, 하경복 등이

진주향교에서 학문을 닦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진주향교를 거닐다 보면

하공진과 강민첨 두 영웅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충절의 고장,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진주.

진주여행에서 그 깊이를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본 포스팅은 SNS 서포터즈가 작성한 글로서 진주시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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