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이 나눈 익산 동부와 서부의

어제와 오늘

김남중 소년소설 <기찻길 옆 동네>

김남중 소년소설 <기찻길 옆 동네>는 1977년 이리 역 폭발사고 전후, 익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익산역은 호남선과 전라선의 분기점이며, 익산↔군산을 잇는 간선 철도는 장항선과 연결되어 2024년 10월 서해선이 개통되면 익산↔런던은 결코 꿈이 아닙니다.

@출처(우) : 네이버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조정래 (아리랑>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 <기찻길 옆 동네>로 점점이 사라져가는 익산의 이야기를 불러냈습니다.


익산역

익산역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순서대로) 1912년 익산역/ 1929년 익산역/ 1970년대 익산역/ 1978년, 이리역폭발사고 후 준공한 이리 역사/ 현재 익산역

과거, 기찻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정서는 좀 달랐다고 합니다.

기 참 난린기라요. 왜놈들이 철도 놓는 거는

조선 땅을 완전허게 즈그 거 맹글자는 수작아닌교.

그보다 먼저 개항이라캐서 부산이다 인천이다

원산이다 목포다, 조선땅 삥삥 돌아감서로

즈그 배들 대기 존 데 골라서 발판 맹글어놓고

그 담으로 철도를 놓는 긴데,

두고 보소, 이눔에 철도가 조선 땅 근기

다 뽈고 조선 사람 피 다 뽈아내는 홈통 될 끼니.

조정래 아리랑 1권

저의 어릴 적 추억을 돌이켜 봐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기찻길 옆 동네 아이로 자랐습니다. 기찻길 옆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다 기차가 지나가면 돌을 던지고, 주먹 욕을 해대곤 했습니다. 당시 그건 그냥 의미 없는 아이들의 놀이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어느 날 故 이어령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기찻길은 일제의 수탈이었습니다, 농사지을 땅도 빼앗기고, 부역까지 해야 했으니 원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기차를 보는 조선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울분이 지나가는 기차에 대고 돌을 던지거나 주먹 욕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감정 실린 풍경은 전설처럼 전해내려 오면서 기찻길 옆 동네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찻길 옆 동네 > 주인공 선학이가 살던 마을은 익산역 뒤 현내입니다. 1970년대 현내는 여느 시골마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 때 당산나무를 죽이려 일본군이 불을 놓아 그을렸다는 전설이 담긴 삼백 년 넘은 당산나무와 할아버지들의 마실 터인 모정이 있는 마을입니다. 보통은 산줄기, 물줄기로 경계가 나뉘는 도시와 촌락이 1970년대 익산은 철길이 가로막으며 도심과 변두리로 나뉘어 도시화가 늦어진 기찻길 옆 동네입니다.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이리 역 광장의 남쪽 끝으로 가면 땅속으로 뚫린 터널이 나왔다. 모두들 굴다리라고 부르는 이 터널은 기찻길 아래로 뚫려 시내와 송학동을 연결해 주었다. 일제 시대 때 뚫었다는 굴다리는 어두컴컴했고 천장에서 항상 더러운 물이 뚝뚝 떨어져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굴다리를 통하지 않고 시내로 나가려면 현대 앞 건널목으로 가든지 상업고등학교 앞 건널목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보통 이십 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다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굴다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기찻길 옆 동네 p196>

현재 익산역 굴다리

하늘에 팽팽히 걸린 거대한 다리가 아니라

이리역지하도 굴다리, 땅속을 흐른다

이곳을 통과하려면 딱정벌레처럼

어깨를 접어야 하리

누군가 보면 물이 되어 스며드는 것처럼.

빈부격차가 없는 흐린 불빛 속으로 가면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과일 손수레도

밝은 세상 가자고 부지런히 삐그덕거린다

안도현 시/ 「이리역 굴다리」(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일부 발췌

아이러니하게도 1977년 이리역 화약 폭발사고는 <기찻길 옆 동네>가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현재, <기찻길 옆 동네>는 익산의 신도심이 되었습니다. 익산의 구도심이었던 익산역 동부의 번영은 쇠락하고, 당시 딱정벌레처럼 어깨를 접어 철길을 건너야 시내로 갈 수 있었던 익산역 서부 지역이 번영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1960년대 이리시

@출처/ 이야기로 듣는 이리·익산 그리고 사람들 1/ 김영규화백이 그린 1980년대 이리시 지도

현내가 어딜까? 지금은 존재마저도 희미한 지명입니다. 저는 <기찻길 옆 동네> 선학이가 살던 현내 마을의 유래를 찾아보았습니다. <원모인 마을 이야기 > 는 익산도시문화센터 지원으로 발간한 익산 시민 아카이브 사업의 일환으로 세상에 태어난 이야기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겨우 소설 <기찻길 옆 동네> 배경이 된 현내 마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현동은 이전의 북일동, 고현리, 모인리 구역이

합해져 오늘날의 모현동을 이루었다.

고현리의 현내(설내) 마을은

옛날 옥야현 때 현 치소(治所)가 있었으며,

뒤쪽 배산에는 성이 있었고,

옆 옥창산에는 창고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 치소 입구에 동문이 있어

동문리라는 지명이 전하고,

이정표인 장승이 세워져 있었던 곳에는

장승구지(모현동의 외장리, 내장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수곡리(현 원광여중고 자리)는

병영이 있었기에 수곡(戍谷)으로 불리었는데

수곡(水谷)으로 변하여 전하고 있다.

원모인 마을이야기 p.11에서

길에는 참 묘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兪漢雋

제가 길 위의 인문학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소설 <기찻길 옆 동네> 속 묘사를 따라 익산역 주변 도보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익산시민기록관의 자료 사진과 동행한 도보여행은 시공(時空)을 넘나드는 어메이징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시민기록관은 시민들의 아카이브 활동을 집대성한 플랫폼입니다. 향토사가 자라는 공간입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지역의 시민기록관을 이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워져가는 역사를 만나는 순간, 여행에 또 다른 의미가 담기는 경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철도관사마을이라구요?

사실 이런 인문환경이 아니면 굳이 철도관사마을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애써 불러오자면 바로 철도청 직원들의 숙소로 쓰였다는 이 건물과 좁은 골목뿐입니다.

철도 직원들의 숙소로 쓰였다는 건물과 좁은 골목길

굳이 그 이유를 따져 묻자면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으로 시계를 돌려야 합니다.

사고 당시 한국과 이란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 TV로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선학이는 소라 껍질처럼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생강차를 홀짝거리며 흥분한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소리소리 지르는 TV 중계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 어? 뺏긴다, 뺏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상대 선수를 노려보는 순간 "콰광!" 폭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익산의 현대사를 가르는 분기점입니다.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이리역 폭발사고 현장

"저게 폭탄 구멍인가?" "그런가 봐!" "끝내 준다." "원자폭탄인가? 선착이가 아는 체를 했지만 대답하는 아이는 없었다. 아이들은 곳곳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역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 잘린 간선 철로가 고사리 순처럼 말려 있었고 화차 수십 대가 장난감처럼 엎어져 있었다. 승강장 가운데 있던 콘크리트 건물은 정확하게 절반이 짜부라졌다. 다행히 여객용 기차가 다니는 본선은 파손되지 않아 수북이 쌓인 쓰레기를 치워내는 기차의 통행이 가능해졌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우왕좌왕 역내를 오가고 있었다, 거대한 폐허 안의 사람들은 마치 물이 말라가는 웅덩이 속 올챙이들처럼 보였다.

<기찻길 옆 동네 p.137>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아이들의 눈길은 세창상회 옆 비교적 바람이 덜 드는 구석에 깔린 수십 채의 이불이에 모아졌다. 흙바닥 위에 비닐이나 판자, 마분지 상자 같은 것을 깔고 그 위에 편 이불 속에서 꼬마들이 키득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이들이 본 낯익은 얼굴 하나가 이불 속으로 쑥 사라졌다, 선학이는 친구들이 돌아간 후 병철이 있던 이불을 향해 걸어갔다. 조용히 신을 벗은 선학이는 다짜고짜 이불 속으로 쑥 파고들었다, 캄캄한 이불 속에 누워 있던 병철이가 깜짝 놀랐다. "누구야?" 나야." 선학이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기찻길 옆동네 p.140>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모현아파트가 들어섰던 자리에는 현재 익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배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익산 신시가지 모현동

도시의 발전을 30년 앞당겼다는 이리역 폭발사고의 피해 현황입니다.

전라북도가 집계한 열차 폭발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으로 총 1,402명에 달한다.

피해 가옥 동수는 전파가 811동, 반파가 780동,

소파가 6,042동,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 피해 총액이 61억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 수만도

1,674세대 7,873명이나 되었다.

이리역폭발사고 [The Explosion Accident of I-ri station, 裡里驛爆發事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1977년 11월 15일 합동위령제

이 사고로 누군가는 소중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가족을 잃어야 했습니다.

익산의 발전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피어난 꽃입니다.

​아픔을 기억하는 표식이 여전히 여기저기 남아있는 익산역 서부에서 잠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톺아보는 여행을 권해드립니다.

익산역을 가로지르는 모현육교의 생일은 1978년 6월 30일입니다. 모현육교를 건너다니는 사람들 중 과연 몇이나 이리역 폭발사고를 기억할까요? 제가 <기찻길 옆동네>를 꺼내 그날을 반추하는 이유입니다. 포쇄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 과거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익산역 서부 출입문을 나서면 긴 복도가 있습니다. 익산역의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갤러리에서 여행을 시작해 보세요.

그리고 긴 계단을 내려가 <기찻길 옆 동네> 선학이가 살았던 현내 마을을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결코 아프기만 한 곳은 아닙니다.

다만 과거와 대화하며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꿈틀대는 익산역 서부 모현동이 있습니다.

@출처: 익산시민기록관 온라인 전시

7년이 지난 오늘, 배산만 제 자리 있을 뿐 모든 것이 다 바뀌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발 84m 밖에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배산은 익산에서 일어난 세상일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배산이 지켜본 익산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해 질 녘을 택해 산에 올랐습니다.

배산 정상에서 서산 낙조를 바라보며 유난히 많은 부침을 겪어온 역사 속 익산역과 김남중 소설 <기찻길 옆동네> 기행을 마쳤습니다.

배산 정상에서 즐기는 저녁노을 霞霞



글, 사진=권미숙 기자

{"title":"김남중 소설 <기찻길 옆 동네> 익산 이야기","source":"https://blog.naver.com/jbgokr/223425927212","blogName":"전북특별자..","blogId":"jbgokr","domainIdOrBlogId":"jbgokr","logNo":223425927212,"smartEditorVersion":4,"lineDisplay":true,"outsideDisplay":true,"cafeDisplay":true,"blogDisplay":true,"meDisplay":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