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고려시대의 대문호 '이규보'의 흔적을 찾아서, 이규보 묘
918년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1392년 고려 멸망까지
긴 고려의 역사에서 강화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지역입니다.
강화도는 1231년 몽고의 침범 이후
약 39년간의 대몽항쟁 시기에
임금이 피신처이자 고려의 수도였기에
곳곳에 역사적 유적지는 물론
인물에 대한 유적지도 많습니다.
특히나 강화 읍에는 고려궁지를 비롯한
여러 고려 시대의 유적지가 있고
아울러 고려 인물에 대한 유적지들도 있습니다.
그 시대의 인물 중 가장 뛰어난 분을 머리에
떠올린다면 제일 먼저 이 분의 이름이 생각납니다.
<이규보 묘>
중고등 학창시절에
고려시대의 학자 이규보의 이름은
많이 듣고 많이 외워야 했습니다.
천재는 어느 시대이던 별과 같이
시대의 어둠을 빛으로 밝히는 큰일을 한 후 사라져 가지요.
고려 중기에 문관 천재로 태어난 이규보를
그런 인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약 2,000수가 넘는 한시를 남긴 이규보는
한국의 문학사에 뛰어난 문학가이며
벼슬을 하면서 몽고와의 외교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169년 출생하여
1241년 74세에 사망하기 하루 전까지
외교문서를 작성하였고,
고려시대의 권신이었던 최우의 큰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인정받았으나
15세부터 시작한 과거시험에는 번번이 낙방하고
4번째인 22세에야 겨우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이 규보인 유래가 재미있습니다.
과거시험 전날 꿈에 문장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이 나타나 '합격'을 알려주어,
규보로 개명하였다 합니다.
1231년부터 시작된 고려와 몽고의 전쟁인
여몽전쟁 때 조정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 와
1241년 진강산 동쪽 기슭에 잠들어
천재적인 머리를 준 하늘의 별인 규성으로 돌아갔지요.
젊은 시절 그는 고려 21대 임금인 희종의 시대에
당시 실권자인 무신 최충헌에게 신임을 받고
'문하사랑평장사'라는 벼슬을 받습니다.
그가 쓴 역사소설인 고구려 동명성왕의 이야기는
학창 시절에 시험에 꼭 나오는 문제였습니다.
또한 팔만대장경을 조판할 때 그가 쓴
'대장각판 군신기고문'은 그의 저서인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습니다.
동국이상국집은 그의 사후에 그의 아들이 누락된 부분을 찾아
현재 거의 800여편의 시문이 53권에 담겨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그는 관직생활 중
때론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지방으로 좌천되거나
전라도 부안군에 있는 최서단의 섬인 왕등도같은
외딴 곳에 유배되는 등 여러 가지로 파란도 많았지만
힘겨운 관직 생활 중에도 풍류를 즐기고
글을 쓰는 작품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묘는 온수리 공영주차장에서
강화의 가릉까지 걷는 나들길의 3코스인
'고려왕릉길'을 걸을 때
약 5.5km 지점에서 만날 수 있지만,
이 길은 서해랑길 100코스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나들길 걷기 차 걸어서 가던 길을
승용차를 타고 편하게 길상면 까치골 길에 있는
그의 묘소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묘소는 강화도에서 잠자고 있는
여느 역대 임금들의 묘소보다 더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고
주위의 조경도 보기 좋습니다.
그의 호인 백운거사(흰 구름 속에 거처하는 은둔 선비)처럼
그의 묘지에서 어떠한 엄격함보다는 친근함이 느껴졌습니다.
아마 그는 정치보다는 풍류를 즐기는 선비였을 것 같습니다.
그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유영각 안에 들어가니
'문장에 공평함을 따른다'는 뜻인
그의 시호인 문순공 이규보의 영정이 걸려 있더군요.
누군가 향을 피운 흔적이 있고,
그 안에 있는 방명록에서 가슴이 뭉클한 글씨를 보았습니다.
무척이나 어색한 필체로 모두 형제인 듯
성씨는 같은데 '선조 성묘, 문순공파'라고 쓴
글의 아래 가족들 이름 옆에는
미국 버지니아라고 쓰여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가 가족의 선조께 성묘하고자
단체로 찾아온 미국 이민 가족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마 자녀들이 커다란 긍지와 조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그 앞장에 쓰여있는 글을 보고는 그만 나는 '빵' 터졌습니다.
어떤 학생인지 '선생님 문제를 틀려 죄송스러운 마음에 뵙고 갑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서명을 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묘역으로 찾아갔습니다.
한 여름이라 잔디가 무성하게 자랐을 것
같았는데 잔디도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묘역에는 봉문과 상석, 석등 그리고 망주석 한 쌍이 있고
양옆으로 석장승과 오랫동안 풍상을 맞은 듯
형체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석양(石羊)이 각각 한 쌍 세워져 있지요.
묘역의 뒷부분에는 건강한 소나무 숲이
병풍 친 듯 둘러져 있고,
앞쪽으로는 너른 논에 푸른 모들이 카펫처럼 펼쳐져 있어
이곳이 명당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잔디 언덕의 아랫부분에는 이규보가
공부하던 곳이라고 하는 '사가제 (四可齊)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개경에 머물렀을 때의 별장이라고 하는데
'밭이 있어 양식을 구할 수 있고,
뽕나무가 있어 옷을 지을 수 있고
샘물이 있어 마실 수 있으며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마련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무척이나 긍정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가제 입구의 비석에 한자로 써 있는
내용은 이규보의 일생과 공적으로 생각되네요.
사가제 안에 있는 가옥의 마루 위 현판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백운제 (白雲齊)라고 쓴 글씨가 보입니다.
술과 거문고 그리고 시가 없으면 한시도 못하는
백운거사가 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영국이 셰익스피어같은
대문호를 가지고 있음에 커다란 긍지를 가졌듯이
우리 역사에도 이규보 같은 큰 문장가가
있음에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이규보묘 찾아가는 길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관람시간/관람료 : 24시간 개방 (관람료 없음)
주차장 : 입구 공터에 무료 주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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