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죽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

양평사람으로 태어나

겨레의 지도자로 일생을 마친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이

한반도의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 합작을 시도하며

생전 남겼던 말이다.



2025년 5월 25일 일요일,

여운형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을 찾았다.

신원역 우측으로 난 길로

1km 남짓한 언덕을 오르니

몽양 여운형 기념관과 교육자료관,

그리고 복원한 생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역사적인 날.

몽양 여운형의 탄신일이

바로 오늘이다.

생일 축하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은

가벼운 마음으로 기념관에

발을 내딛었으나,

찬찬히 둘러 보는 곳곳마다

조국의 독립과 더불어

통일된 조국에 대한

여운형의 못다 이룬 꿈이

쓰리게 묻어나면서

이내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괴한의 총탄에 생을 마감할 당시,

빛바랜 채 선명히 남아있는

‘핏자국 옷’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나라 걱정으로

고단한 일생을 살아온 '여운형'

그분의 인생역정이

꽤나 울림을 주었다.

139년전 오늘, 완연한 봄날

이곳 묘골에서 태어난 여운형은

16세까지 동학을 수학하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는 한편,

집터에 광동학교를 설립,

지역 청소년들에게

신학문과 성경을 가르치며

지식인을 육성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교육인, 체육인,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여운형은

해방 이후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했다.

미군정이라는 현실에서

남북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자본가와 지주까지도 포괄하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을 만들어

좌우 세력의 균형과 연합을

이루려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좌우 세력으로부터

12차례 테러를 당하였고,

끝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교차로에서

극우 세력의 흉탄에 쓰러졌다.



지난 2005년

대통령장 2급 서훈을 받은 여운형은

타계 후 58년이 지나서야

‘좌익 빨갱이’ 라는 이념의 굴레를 벗고

우리나라 근대사의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역사적 재조명을 받았다.

뒤늦게나마

잘못된 역사적 평가로부터

복원된 셈이다.

이후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에 이어

본격적인 기념사업이 펼쳐졌으며

2011년 생가 및 기념관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66) 등이

조성됐다.



또 몽양 생가와 기념관이

현충시설로,

묘소와 피살 당시 입었던 '혈의'는

각각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여운형은

이념적 생각이 다르면 적이 됐던

좌, 우익 사상이 사회 전반을 장악하던

해방정국 시절, 그 이분법에 의해

희생당한 인물이다.

1945년 해방 직후

당시 대통령 여론조사

1위를 할 정도로

여운형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청년 여운형'의 청년시절과

독립운동을 똑똑히 기억하는

여운형의 제자 이기형은

과거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이순신 이후

우리민족 최고의 성웅이었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에서

‘빨갱이’ 로 왜곡했다”고

단언했다.

또 “해방정국 당시

외국이 아닌 국내에서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김구 선생의 업적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며

“좌·우익과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을 모두 초월한

우뚝 솟은 인물” 임을 강조했다.



청년시절 광동학교(교회)를 건립하고

훗날 상해에서 인성학교를 세울만큼

후학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던

여운형 선생은

일찍이 서양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박애정신과 신분제도의 모순점을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다.

“1908년 23세때인 여운형은

양친의 삼년상을 치른 다음

일대 혁신적인 큰일을 단행합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갖가지 신주와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종들을 모조리 해방시켰던 거죠.

평소에도 자신을 잘 따르던

신분이 낮은 평민이 죽자

시신운구를 손수 매었고

종의 자녀들에게

돈을 나줘주곤 했어요.

당시 사회분위기에서는

양반신분으로는

말도 안되는 얘기였거든요”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청년 여운형은

집안의 노비와 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대들을 다 해방시키겠다.

지금부터 각기 자유롭게 행동하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서방님’ 이니 ‘아씨’니 하는

호칭부터 싹 없애라.

오직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이니

주종지의(主從之義)는

어제까지의 풍습이요.

오늘부터는

그런 낡은 껍데기는 벗어 던지고

제각기 알맞은 직업을 찾아가라”

“청년시절의 여운형은

청년때부터 봉건유습을 타파하는

박애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이

꽉 차 있었죠.

저는 몽양을

선천적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몽양 여운형 선생은

요주의 대상 1호였다 한다.

“해방전 일본이

몽양선생을 포섭하기 위해

초청한 때에도

목숨을 걸고 일본에서

독립운동과 강연에 나선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일본인들까지

달변가인 몽양 선생에 매료되자

당시 일본 국회에서는

‘몽양 국회’ 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몽양 선생의 독립운동을 방치한 책임을

일본 국회차원에서 문책하는 등

국회와 일본 내각을

뒤흔든 적도 있었다” 고

제자는 전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내 우익에 의해

친일행각으로 매도되고

정치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며

당시 정치적으로 혼탁한

시대상황을 안타까워 했다.



우뚝 솟은 지도자로 평가받았던

여운형을 정의하는 수식어는

너무 많다.

‘조선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조선독립의 당위를 주장한 외교가’

‘계몽을 실천한 기독교 선교사’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청년과 문학을 사랑한 언론인’

‘세계로 나아간 조선의 혁명가’

‘한국 체육의 초석을 놓은 스포츠맨’

‘사상을 뛰어넘는 사회민주주의자’

‘통일국가를 꿈꾼 민족주의자’

.

.



2005년 역사적 재조명 이전

여운형 선생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마치 바둑판에서처럼

흑 아니면 백을 쥐어야 하는

극좌와 국우만이 존재하던

지극히 단순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흑과 백을 모두 차지하기도,

흑과 백 모두에게

결국 소외되기도 했다.

또 사후에도

정치적 이념의 굴레에

겹겹이 쌓이면서

수많은 세월 동안

여운형이라는 이름은

대놓고 찬양하기에는

아주 용기가 필요한,

그래서 거론조차 않는 것이

상책으로 인식돼 왔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비로소 반세기 이상

잃어버렸던 몽양 여운형은

고향 양평의 품에 온전히 돌아왔고

해방 정국 근대사의 역사도

바로 세워졌다.



역사의 물줄기엔

늘 크고 작은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운명을 결정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로 인한 나비효과는

결국 혁명적이든 퇴행적이든

과거의 역사로 남는다.

여운형이라는 높고 위대한 지도자가

희생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황, 질곡의 역사에

깊고 진한 아쉬움이 들었다.

'그 역사의 변곡점에서

그 운명이 달리 바뀌었다면 어땠을까?'하는

궁금증이 갑자기 발동됐다.



해방 정국, 좌와 우의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나섰던 여운형과

김구 선생의 합작 운동이

성공을 했더라면...

또 유력한 정치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들이

암살을 피할수 있었다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야 했던

야수성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떠한 물줄기로,

어떠한 나비효과가 되어

현재에 이르렀을까?

그때의 ‘빨갱이’ 란 극단적인

이념적 저주와 혐오가 양분이 되어

뿌리내려진 현실을

아직도 종종 마주할 때

더욱더 드는 생각이다.


'5월 가정의 달, 몽양의 달' 맞이 5월 한달간 진행된 무료 입장 / 평소 입장료도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니 꼭 한번 방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오시는 길 / 문의전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66

몽양기념관(031-77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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