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기자]

포은 정몽주 선생

학창 시절 한국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도

대부분 아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정몽주는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회생시키려다가

선죽교에서 순절한 충신입니다.

정몽주 선생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1호로 중요한 사적지입니다.

그의 묘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을 찾아가 봤습니다.

정몽주 선생 묘소 입구ⓒ이재형 기자

정몽주 선생 묘소 입구에 표지석이 있고,

옆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포은 선생 묘소까지 좀 걸어가야 하는데요,

약간 등산하는 기분으로 가야 합니다.

소나무 한그루 ⓒ이재형 기자

묘역 입구에 소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그리고 좌측에 신도비각이 보입니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합니다.

신도비는 비각 안에 있습니다.

신도비 ⓒ이재형 기자

신도비를 안 보고 갈 수 없죠.

비각은 관리상의 문제로 열쇠로 잠겨져 있는데요,

문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도비는 맨 위에 한문으로

'포은 정선생'(圃隱 鄭先生)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문으로

공적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안내도 ⓒ이재형 기자

신도비를 본 후 묘역으로 올라가는데,

우측에 정몽주 묘역 안내도가 있습니다.

안내도 좌측에는

정몽주(1338~1392) 선생의 생애가

영어와 한글로, 중앙은 묘역 안내도,

우측은 중국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안내도를 보면 묘역이 왕릉 못지않게 넓습니다.

이석형 성생 신도비각 ⓒ이재형 기자

정몽주 묘역 안내도를 지나면

우측에 저헌 이석형 선생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이석형 묘도 정몽주 묘역에 함께 있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저헌 이석형(1415~1477)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조선 최초로 세 가지 과거(생원, 진사,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삼장원’으로 불릴 만큼

똑똑한 관료였다고 합니다.

기와집 ⓒ이재형 기자

이석형 신도비를 지나

다시 묘역으로 올라가다 보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몇 채 보입니다.

아래서부터 경모사, 모현당, 영모제입니다.

이런 건물들은 관리상의 문제로 문이 닫혀 있어서

출입할 수 없고 외관만 볼 수 있습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이재형 기자

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도 눈에 띄는데요,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입니다.

이곳에 해설사가 있는데요,

월~일요일 10시부터 16시까지

1시간 단위로 해설을 해줍니다.

저는 정몽주 묘소를 여러 번 가서

해설은 받지 않고 팸플릿만 얻었습니다.

홍살문과 정몽주 동상 ⓒ이재형 기자

문화해설사의 집을 지나면

앞에 묘역으로 진입하는

홍살문과 정몽주 동상, 안내문 등이 보입니다.

동상은 최근에 새로 건립해서 세운 것입니다.

백로가 ⓒ이재형 기자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묘역 입구에 유명한 <백로가>를 적은

검은 표석이 보입니다.

정몽주 어머니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시조라고 하는데요,

간신이나 역신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도록

아들을 훈계하며 지은

은유 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단심가 ⓒ이재형 기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백로가 좌측에는 정몽주가 지은

유명한 <단심가>도 있습니다.

기울어가던 고려지만 끝까지 충절을 지키던

정몽주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정몽주의 일관된 신념도 보이고요.

‘충신 불사이군(忠臣 不事二君’)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 말 때문에

정몽주는 이방원 부하에게 피살당했습니다.

홍살문 ⓒ이재형 기자

백로가와 단심가 표석 왼쪽에 홍살문이 있습니다.

이제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묘역에 진입하게 됩니다.

홍살문 오른쪽에는 정몽주 동상이 우뚝 서 있습니다.

홍살문과 동상 모두 최근에 세워졌는데요,

묘역도 많이 정비되었습니다.

정몽주 선생 묘소 표석 ⓒ이재형 기자

홍살문을 지나면 지방문화재

제1호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 표석이 보입니다.

이 표석을 지나 문수산 쪽으로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라갑니다.

바람이 불어 날씨가 쌀쌀했는데요,

그런데도 가끔 묘소를 찾는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몽주 묘소와 이석형 선생 묘소 ⓒ이재형 기자

정몽주 묘소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저헌 이석형 선생 묘소와 함께 있습니다.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보면

저헌 이석형 선생 묘소 표석이 나오는데요,

오른쪽이 이석형 묘소고 왼쪽이 정몽주 묘소입니다.

두 개의 묘소가 왜 나란히 있을까요?

저헌 이석형 선생 묘소 ⓒ이재형 기자

저헌 이석형 선생 묘소입니다.

문화해설사의 집에서 얻은 팸플릿을 보니

저헌 이석형은 포은 정몽주 손자인

정보(鄭保)의 사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함께 묻힌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니 외롭지 않을 듯 합니다.

곡장 ⓒ이재형 기자

정몽주 묘소는 이석형 묘소와 조금 다르죠?

뭐가 다를까요?

묘소 주변에 담장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곡장(曲牆 : 무덤 뒤에 둘러친 담장)이라고 합니다.

왕릉보다 검소한 묘지만,

곡장까지 있는 것을 보니

후손들이 그의 충절을 높이 산 듯합니다.

부인 경주 이씨 묘소 ⓒ이재형 기자

정몽주 묘소는 원래 개성의 풍덕리에 있었습니다.

조선 태종 6년(1406)에 신원(복권) 되고

관직이 회복되면서

현재의 위치인 문수산 기슭에 천장(이장) 하여

부인 경주 이씨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정몽주 선생 팸플릿 참조)

일대 산 ⓒ이재형 기자

정몽주 묘소에서 보니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일대 산이 한눈에 보입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합니다.

모현면의 '모현(慕賢)' 지명은

'충신을 사모한다'라는 뜻으로

정몽주 선생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지명이라고 합니다.

충렬서원 ⓒ이재형 기자

정몽주 묘소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충렬서원이 있습니다.

충렬서원은 정몽주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9년(1576)에 세운 서원입니다.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되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몽주선생 리플렛 ⓒ이재형 기자

지금까지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정몽주 묘소에서 학창 시절에 배운

<백로가><단심가> 등을 생각해보며

포은의 충절을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이 정몽주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나요?

고려왕조를 버리고 새로운 조선 왕조를 선택하겠나요?

정몽주 묘소를 들러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포은 정몽주 선생 묘역(무료입장)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곡로 45

출입 시간 : 09:00~18:00

문화해설사 해설 10:00~16:00

(1시간 단위로 실시)

☎ 문의 031)332-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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