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SNS 주민홍보단 김비호>

님께서 올려주신 글입니다.

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해 중구 주민홍보단 여러분과

김종대 해설사님이 장충단공원에 모였습니다.

김종대 해설사님의 역사 해설과 함께

탐방한 "장충단 호국의 길" 을 안내드리겠습니다.

수표교

가장 먼저 간 곳은 수표교였는데요, 김종대 해설사님의 말로는 청계천 2가에 있던 이 수표교가 북악산 신흥동으로 옮겨졌다가 1959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또한 수표교에 기원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세종대왕 때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들었던 시기가 있었고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강수량을 측정할 수 있는 다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수표교는 영조 때인 경진년에 완성되었고 이는 다리 두 번째에 있는 경진지평이라 쓰인 글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조는 개조 보수 시 다리에 쓴 '정혜개조' 글씨가 보이게 관리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세종대왕도 물이 잘 흐를 수 있게 마름모 모양으로 다리를 만든 것을 보면 이런 부분에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충단비

다음으로 간 곳은 장충단비 입니다. 장충단 비의 글씨는 조선 27대 왕인 순종의 친필로 쓰인 '장충단'이 쓰여있습니다. 장충동이라는 지명의 기원을 살펴보자면, 장충동은 예전엔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남쪽 부분을 수비하는 어영청 수성의 군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인해 시해된 명성황후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충신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5년 후인 1900년에 고종황제가 재단을 만들었고 이 재단에서 봄, 가을에 제사를 짓는데 충성을 장려한다는 의미로 장충단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08년에 일제로부터 이곳에서 제사를 짓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고 장충단의 제사는 폐지되었습니다. 곧 일본은 그곳에 큰 운동장을 만들며 조선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위한 문화행사를 개최했고 조선 침략의 원영을 추모하는 박문사를 세우고 일본의 대륙 침략을 나타내는 육탄 삼용사 동상을 세우며 장충단이 치욕의 공간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장충단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이 공원에 세운 건물과 동상이 철거되었고 원래는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장충단비는 6.25전쟁이 발발하며 사단과 부속 건물들이 파손되어 사라지고 1969년에 복구되어 지금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장충단 기억의 공간

다음으로 간 곳은 얼마 전에 생긴 장충단 기억의 공간으로 장충단과 남산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들어오면 빔을 통해 10분가량의 영상이 나오는데 장충단의 역사를 간단하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 장서 비

다음으로 간 곳은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 장서 비 앞입니다. 1907년 프랑스 파리 강호에서 전국 유림 대표 137명이 26,704자의 청원서를 작성해서 조선의 독립 문제 해결을 촉구한 장군의 편지로 식민 지배의 불합리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한응 선생 기념비

다음으로 간 곳은 이한응 선생의 기념비 앞입니다. 이한응 선생은 대한민국의 관료 및 외교관으로 런던에서 우리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해 힘쓰고 계시다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늑약을 앞두고 1905년 런던에서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을 하셨습니다. 유서에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욕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 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오호라 장차 종묘사직은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욕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 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오호라 장차 종묘사직은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다음으로 간 곳은 외솔 최현배 선생의 기념비 앞입니다. 보통 일제 강점기에 총과 칼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항전도 있지만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휘해 노력한 언어 독립운동도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어 언어 정책으로 조선의 교과서가 폐지되며 일본어로 편찬하고 일본어로 창시 개명을 시키는 등을 조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동원 정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때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을 배우고 우리말을 지키고 헌신하겠다고 선언하며 조선어학회를 설립하였고 500년간 정리되지 않았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했습니다.

또한 조선어학회에서는 한글의 통일 및 우리 민족이 쓰고 있는 어휘, 사투리,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는 것이었고 또한 일제의 한국어 사용 금지에 저항하여 사전 편찬 및 한글 복원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노력도 하였습니다. 또한 50년대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하였고 초등, 중학교 교과서를 모두 한글로 작성하는 등의 노력을 하셨습니다.

꼭 맞서 싸우지 않더라도 한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내일이 현충일인 만큼 우리들도 우리 민족과 국가의 수호, 발전에 기여하고 애국하시고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모든 분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 해당 포스팅은 주민홍보단 개인 의견으로 중구청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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